[연중 제29주간 목요일]성령의 불 (루카 12,49-53)
로마 교회의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제 의로움의 종이 되어 성화에 이르라고 권고한다.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얻는 것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종이 되는 사람은 성화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로마 6,19-23)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2.3.4와 6(◎ 40〔39〕,5ㄱㄴ)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 세상 사람들을 거스르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루카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은 이단 종파에서도 즐겨 인용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이나 그릇된 맹신에 빠졌을 때,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연히 만류하고 반대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이단자들은 이 말씀을 내세우며 가족의 박해에 맞서 싸우라고 가르칩니다. 심한 경우, 자해를 하겠다고 소동을 벌이면서 가족을 위협하는 방법까지 교육시킨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그들처럼 해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하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도 복음의 가르침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은 복음의 말씀이 참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복음을 몰랐더라면 세상이 옳게 돌아가는지 아닌지 묻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으면서 혼자 적당히 편안하게 살 텐데, 복음은 우리를 그렇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려면 악인의 뜻과 죄인의 길에 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화답송 참조). 이러한 거부와 과감한 결단 없이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시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반드시 크고 작은 갈등과 어려움은 물론, 많은 시련과 인내, 충돌과 좌절, 급기야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힘과 마음을 넓혀 주시어 쉽고 편한 길만 선택하지 않고 외롭고 고독한 길도 마다하지 않을 은총과 용기를 주시도록, 오늘도 마음을 모아 기도드립시다.
<불,
평화> 송영진 모세 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이
구절의 '불'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을 지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타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점화'이고, 불이
붙어서 타오르는 것은 인간들이 각자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들이
각자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사막에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수가
가득한 오아시스로 인도한 일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마워하면서 그 물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맹물은 맛이 없어서 싫다면서 다른 음료수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행복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 가르침대로 실천해서 참 행복을 얻고,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은 싫다면서 자기가
바라는 세속적인 쾌락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 길을 걸어가고, 어떤
사람은 그 길이 너무 좁고 험해서 싫다고 하면서 다른 길로 갑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라는 말씀은 복음을
거부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냅니다.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어도 그 길로 가지 않고 '죽게
되는 길'로만 가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
구절의 '세례'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정말로 고통스럽게 한 것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당신이 희생하고 헌신해도 하느님께
반역하면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의 고집스러운 모습입니다. 자녀가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온갖
고생을 하는 부모를 정말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런
고생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고생을 해도 정신을
못 차리고 빗나가기만 하는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
말씀은 반어법을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뜻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건만 인간들은
평화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분열만 일으키고 있다."입니다. 이
구절의 '평화'는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영원한
생명, 구원,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열'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사람과 얻지
못하는 사람 사이의 분열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참 평화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그리고
그런 미움과 박해는 식구들마저 분열시킵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루카 12,52)" 식구들이
예수님 때문에 갈라지게 될 것이라는 이 구절의 말씀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족이 분열되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심한 박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통치자들의 박해보다 식구들의 박해가 더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라고 하셨는데, 미워하고
저주하고 학대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의 식구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더욱더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그 식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면서 그에게
계속 잘해 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하는데, 식구라면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미움과 학대를 참고 견디면서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면, 언젠가는 그 식구도 신앙인이 될 때가 올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제29주간 목요일 제1독서 (로마6,19-23)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6,19)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6,20)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6,23ㄱ)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6,22)
오늘 독서 말씀은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다. 필자가 성령 운동에 연루되면서, 2000년대 미국에서 피정할때 수많은 사람들을 면담하고 성사주고 안수했다. 그때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하느님께서 체험하게 하셨다.
초창기에 필자가 안수하면, 상대방의 안 좋은 것이 그대로 필자에게 전이되어, 화장실에서 좋지 않은 것을 다 뱉어 내었다. 그것이 한번 두번 쌓이고 쌓여 이제 면역성이 길러졌다. 그때 필자는 "아~인간의 죄가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과 심령까지 다 망쳐 놓는구나!" 하는 것을 뻐저리게 체험했다.
지금도 부마자나 특히 6계와 관련된 사람들을 안수하게 되면, 주님은 좋지않은 냄새를 맞게 하시고, 구토가 가끔 나와서 안수 후에는 반드시 "씻음(정화)의 기도"가 꼭 필요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안수를 안줄 수도 없다. 고통속에 있는 그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사랑이신 성령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죄짓는 것을 죽기보다 더 무서워해야 한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기에, 죄없으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성부 하느님 대전에 그토록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길에서 대속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던가?
우리는 세례의 은총인 성화(聖化)은총(생명의 은총:초성은혜: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초자연적 은혜: 성령의 다른 이름)이 얼마나 고귀한 무상의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고백성사를 통해 회복한 이러한 은총지위를 참으로 잘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 이 성화의 은총(gratia habitualis)이 없으면 하느님께 갈 수 없다. 한마디로 천당에 못 간다.
오늘 독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성경구절을 적어 본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보1,15)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모릅니까?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6,19-20)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10,28)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어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지르러 오신 불은 어떤 불인가? 그 불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요, 그 하느님의 나라는 곧 예수님이시고 그 불은 오늘 우리에게는 복음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하셨듯이 죽으셨다.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불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 번져 나가야 한다.
그럼 이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고 하셨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회개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느님의 나라에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란 바로 복음이다. 내 안에 불이 타오른다는 것은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바오로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필립 3, 6-11)라고 말한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럼 왜 내 안에 이 불이 타오르지 않는가? 그것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한 준비는 회개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한 우리 안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복음이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내 안에 이 불이 타오를 수 없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던 바로 그날 "네 고향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12,1) 이와 똑같이 우리 각자도 저마다가 회개한 그날 마치 아브라함 앞에 약속의 땅을 숨긴 거대한 지평선이 펼쳐졌듯이 그렇게 자기 앞에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질 것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우리 역시 약속의 땅을 정찰하던 선조들처럼 성경을 정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유목민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지칠줄 모르는 순례자처럼 의미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탐색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면 복음의 불이 내 안에서 타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 6,22)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하기 전에 이런 환시를 봅니다.
"프란치스코야, 너는 종을 섬기길 원하느냐 주인을 섬기길 원하느냐?"
프란치스코는 대답합니다.
"당연히 주인을 섬겨야지요."
그러자 이런 말씀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너는 왜 종을 섬기려하고 있느냐?"
그제서야 프란치스코는 깨닫습니다.
"아, 내가 주인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종을 섬기고 있었구나!"
프란치스코는 기사가 되려는 열망에
어느 장군의 부하가 되려고 전장에 나가는 길이었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의로움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죄의 노예(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사람을 섬기기보다 하느님을 섬기고
죄의 종이 되기보다 의로움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사도 바오로는 오늘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누구를 섬기고 있고 무엇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까?
오늘 곰곰이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