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토요일]참 행복 (루카 11,27-28)

2015. 10. 10. 오전 6: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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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간 토요일]참 행복 (루카 11,27-28)

참 행복은 뭘까

요엘 예언자는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고한다.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는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민족들의 악을 심판하실 것이며, 시온에 자리를 잡으시고 당신 백성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다. 주님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그곳에서부터 생명과 축복이 퍼져 나갈 것이다.(요엘  4,12-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2 “민족들은 일어나 여호사팟 골짜기로 올라가라. 내가 사방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려고 거기에 자리를 잡으리라. 13 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 와서 밟아라. 포도 확이 가득 찼다. 확마다 넘쳐흐른다. 그들의 악이 크다. 14 거대한 무리가 ‘결판의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결판의 골짜기’에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15 해와 달은 어두워지고, 별들은 제 빛을 거두어들인다. 16 주님께서 시온에서 호령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를 치시니, 하늘과 땅이 뒤흔들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새가 되어 주신다. 17 그때에 너희는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사는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다시는 이방인들이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리라.
18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19 이집트는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량한 광야가 되리라. 그들이 유다의 자손들을 폭행하고, 그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20 그러나 유다에는 영원히, 예루살렘에는 대대로 사람들이 살리라. 21 나는 그들의 피를 되갚아 주고, 어떤 죄도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주님은 시온에 머무른다.”


돌나라 안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

시편 97(96),1-2.5-6.11-12(◎ 12ㄱ)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      

*♡♥ 참 행복의 조건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육신으로 그분의 어머니가 되는 것보다, 그분의 제자가 되는 이들이 더욱 행복하다.(루카 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절망과 좌절은 참된 행복의 싹

요엘 예언서의 말씀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하늘과 땅이 뒤흔들린다는 등, 생경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상징들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주제에만 머물러 보겠습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 안에서 종말에 대한 관심은 주로 유배 이후 늦은 시기에 나타납니다. 요엘서뿐만 아니라 즈카르야서, 제3이사야서 등 여러 예언서에서, 종말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인데, 서로 병행되는 본문인 미카서 4장과 이사야서 2장에서도,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는 시온에 자리하십니다.
물론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고 성전 안에는 하느님의 옥좌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이 예언서들이 그려 보이는 종말의 장면은 첫 번째로 심판입니다. 우선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시는 하느님께서 불의를 심판하시고 세상을 정화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시온으로부터 구원이 세상으로 전해집니다. 에제키엘서도,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나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넘쳐 나리라고 이미 예언했지요(에제 47장). 요엘서도 시온 산을 중심으로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고 예고합니다. 이와 같이 심판 뒤에는 구원이 있을 것인데, 지상에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장소인 예루살렘이 그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써 이러한 예언들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세상 구원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참된 행복

<참 행복>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어떤 여자가 한 말은, "당신 같은 아들을 둔 당신의 어머니는 복되신 분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당신의 어머니가 복되신 분이라는 것을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긴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구세주의 어머니라는 점에서도 복되신 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내용은 '참 가족'에 관한 가르침과 뜻이 비슷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실행하는) 사람은,예수님의 참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복된 사람입니다.


성모님은 복된 사람들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신 분입니다. 엘리사벳이 바로 그것을 증언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복되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신앙인들의 행복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복된 상태는 곧 행복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행복'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내용을 '참 행복' 선언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루카 6,20-23)."

이 말씀은, 가난과 굶주림과 슬픔과 박해가 행복하다는 뜻이 아니라, 나중에 얻게 될 '하느님 나라의 삶'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사람은 '지금' 그 행복을 미리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행복'을 '기쁨'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루카 10,21.공동번역)"

이 기쁨은 소외 계층 사람들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구원을 받게 된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는 것이 예수님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선교활동이 큰 성과를 거두고 교회가 점점 더 크게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당연히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박해를 받았을 때에도 기뻐했습니다. "...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사도 5,39-41)."

사도들은 박해를 받아서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 박해를 통해서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어서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참 행복' 선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 '기쁨'은 박해를 참고 견디는 힘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기쁨을 말하면서 신자들에게 함께 기뻐하자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6-18)."


지금 말하고 있는 행복과 기쁨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 기쁨인데, 나중에, 즉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되어서, 지금 누리는 행복과 기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에서는 슬픔과 고통만 겪다가 죽어서나 행복하게 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행복한 생활이고, 지금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지금 행복하고 기쁘니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행복과 기쁨이 완성되고 완전해지는 나라입니다.)


만일에 안 믿는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행복하고 기쁜가?" 라고 묻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 자체가 행복이고 기쁨이다.", 또는 "하느님(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기쁨이다." 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데, 그 행복과 기쁨을 '말로' 설명하는 일도,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떻든, 우리는 지금 기쁘고 행복하니까 이 세상에서의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디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면서, 또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그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7월 6일의 묵상 -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참된 행복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여러분은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나요?
누가 그렇게 부러우세요?
돈많은 누군가가 부럽고
멋진 남편
아리따운 부인을 가진 이가 부럽고
잘 난 자식 둔 부모가 부럽고
신앙심이 두터워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많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교우를 보면 부럽지요?

그런데 부러우면 지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
남 부러워하지 않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 하시네요.

그래요.
오늘은 괜시리 남 부러워하며
내 신세타령 하지 말고
하느님 말씀듣고 지키며
나만큼 행복한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봐 하며
가을하늘처럼 맑고 깨끗하게 한번 웃어봅시다.
화이팅!


참된 행복

하늘을 차지한 사람     반영억라파엘 신부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청주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 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순명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양보와 배려, 희생을 하고 있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을 행하고 있다면 복됩니다.

혹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 놓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히려 행복하다>(루가11,27-28)    

2009-10-10   -故 유 광수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을 보고 군중이 매우 놀라워하였다. 그 군중에서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외친 것이다. 같은 여인으로서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가 무척이나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마 이 여인은 자식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썩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아들을 생각할 때 이처럼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인만이 생각할 수 있는 행복관이다. 사실 어머니들의 행복은 자식들이 잘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식이 좋은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모습을 보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 여인은 소박한 여인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여인만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기 위해 쏟았던 정성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인이 말한 행복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 행복은 여인이 남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얻어진 행복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행복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것을 정성껏 돌보고 가꾼 것에서 주어지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정성껏 가꾸고 생활하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이 육체의 모성적인 표현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라는 표현은 영적인 모성적인 표현이다. 다만 인간적인 모성이냐 영적인 모성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육체적인 모성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듯이 영적인 모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모성애는 행복의 근원이다. 다만 무엇을 배에 잉태하고 가슴에 안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기쁨에서 오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영적인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은 제한적이고 또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도 있는 행복이다. 빼앗길 수 있는 행복이다. 불안한 행복이요 변할 수 있는 행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한 행복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행복이요, 영원한 행복, 늘 함께 할 수 있는 행복, 변치 않는 행복이다. 아무튼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맛보는 행복 그 이상의 행복 즉 영적인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여인이 생명을 배고 젖을 먹이듯이 그런 정성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모태에 배고 가슴에 안아 젖을 먹이는 정성과 사랑을 쏟는 이만이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파스칼은 모성애에 관해서 말할 때면 꼭 그 특징적 장점으로서 "합일의 정열"을 든다. 자식과 함께 있고 싶다, 함께 살고 싶다는 모성의 정열을 말한다. 자식과 운명을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그 합일의 정열이야말로 여성의 본능이며 위대함이기도 하다. 사실, 한자에서는 여성과 자식을 안데 합쳐서 "좋다"(好)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스칼은 합일의 정열만으로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식의 어리광을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식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어머니가 자식의 인격 형성에 최대의 장애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모성의 "분리의 정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지만, 모성애는 하나였던 것이 두 사람의 별개의 인간으로 나뉘는 사랑이다. 모성애란 이별과 상실을 최종 목표로 한 서글픈 사랑인 것이다. 사실 태아는 어느새 모태에서 미끄러져 나와 곧이어 젖이 떨어지고 마침내는 창세기의 결혼관에 나오듯이 "어버이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간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의 최종 단계를 다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를 멀리 놓아 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이나 지배욕을 버리고 그 대신에 이타심을, 주는 능력을 사랑하는 자의행복만을 바랄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시련을 돌파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교육이란,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작업을 말한다.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끔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서 세상을 비관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왜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독립시켜 준 그만큼 자식은 부모를 독립시켜 주는 셈이고 그것이야 말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보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식의 도약대로서 짓밣히고, 자식의 비료로서 썩어갈 각오가 어머니 쪽에 있을 때에 비로소 자식은 주체성을 지닌 인격으로 커나가는 것이다.
가장 숭고한 모성애는 "합일의 정열"이 아니라 그야말로 "분리의 정열" 속에 있음을 마리아는 몸소 증거해 보이셨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말한 행복은 자식과의 일치 즉 자식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관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다. 인간적인 행복관은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을 언젠가는 빼앗기기 때문에 서글프고 허전하고 외로운 행복관이라면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은 이별이 없는 영원히 함께 사는 행복관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인 합일의 정열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관이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이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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