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카 10,25-37)
요나서는 유배에서 돌아온 뒤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찾는 데에 매몰되어 다른 민족들을 배척하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게 해 주는 책이다. 요나는 다른 민족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려는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하지 않으려고 도망치지만, 하느님께서 그 길을 막으신다.(요나 1,1ㅡ2,1.11)
1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4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5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6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7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8 그러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말해 보시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이오?” 9 요나는 그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 사람들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요나가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그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3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 14 그러자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15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16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2,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11 주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셨다.

요나 2,3.4.5.8(◎ 7ㄹ 참조)
◎ 주님, 당신은 구렁에서 제 생명을 건지셨나이다.
○ 곤경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당신은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저승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 당신은 제 소리를 들어 주셨나이다. ◎
○ 당신이 저를 바다 속 깊은 곳에 던지시니, 큰물이 저를 에워싸고, 그 모든 파도와 물결이 제 위로 덮쳤나이다. ◎
○ 제가 아뢰었나이다. “당신 눈앞에서 쫓겨난 이 몸, 어찌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다시 바라볼 수 있으리이까?” ◎
○ 저의 넋이 아득해질 때, 저는 주님을 기억하였나이다. 저의 기도 당신께,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 다다랐나이다. ◎

율법 교사도 사랑의 범위를 제한하려 한다. 그는 그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예수님께 묻지만, 이웃의 범위는 처음부터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이웃이 된다.(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요나와 율법 교사의 모습이 똑같아 보입니다. 율법 교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고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 교사였습니다. 분명 그가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이웃’의 범위를 제한하려고 합니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본디 레위 19,18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동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독서에는 요나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도망치는 이유가 나오지 않지만, 모레 독서에서 밝혀집니다. 요나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용서하실 줄을 알았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시리아의 니네베 사람들에게 그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싫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지 않고 멀리 도망치려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지 따질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힘닿는 데까지 무조건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마리아 사람처럼 가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마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은 추상적이거나 아주 먼 곳에 있지 않고 아주 가까운 곳,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 안에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해나 달이나 별을 따다 주어도 자기가 베푼 것은 아주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가지!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과묵하고 고독한 사람으로 소개되는 반면, 선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요나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잡신을 믿는 다른 사람들은 배 위에서 폭풍과 힘겹게 싸우면서 자기 신의 뜻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지만, 정통 신앙인 요나는 하느님의 뜻에 여전히 반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율법학자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묻자(루카 10,29),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그에게 물으십니다(루카 10,30-36).
'이 세 사람'은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등장인물이 더 있습니다.
강도들과 여관 주인입니다.
우리는
그들까지 포함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였습니다.
이 질문에는 이웃에게만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문은
"(이웃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인가?"입니다.
이 질문에는 "모든 사람은 전부 다 이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고 묻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니까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만(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이 그냥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 신분,
직업, 나이, 인종, 민족, 국적, 종교 같은 것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뿐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겠지만,
서로 아는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 안다면, 친한 사이일 수도 있고, 원수 같은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
역시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이 비유를 오늘날의 상황에서
생각하면,
이념과 사상이 다르고 정치적 성향이 달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도움을 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남과 북, 기득권층과 소외 계층,
자본가와 노동자, (공산주의자, 혁명론자...) 기타 등등,
그런 것을 따지지 말고 묻지도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유대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도와준 사람으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것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질문한 사람이 유대인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을
것입니다.
(모든 사마리아인이 다 착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이웃 사랑 실천'이기도 하고,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간
사람을 사제와 레위인으로 설정하신 것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사제와 레위인은 거의 대부분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강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점에서 성전 정화 사건이 연상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이 말씀에서 '강도들'은 일차적으로는 사제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친 사람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을
사제로 설정하신 것은, 사제들을 꾸짖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자들이기 때문에...
또 가장 먼저 모범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안 하고
있으니까...
등장인물들 가운데 하나인
여관 주인의 경우,
이야기 속에서 그는 자기 직업에만 충실한 사람이고, 그냥 방관자로 등장합니다.
여관 주인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부탁대로 다친 사람을 보살펴 주었다고 해도,
돈을 받았기 때문에, 또는 돈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한 일이라면,
그가 한
일은 '자비'가 아닙니다.
물론 다친 사람을 보살펴 준 일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돈 때문에 한 일이라면 이웃이 되어 준 일도
아니고,
자비를 실천했다고 인정받지도 못합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이 자비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강도들이 떠나버린 뒤의 상황인데,
만일에 강도짓을 하는 현장 상황이라면?
사제와 레위인은 못 본 척 하면서 지나갈
사람들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들어서 강도짓을 막을 사람입니다.
만일에 강도들이 떠날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다가
그들이 떠난 다음에 피해자를 도와주는 것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와 맞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강도들의 경우,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이웃들을) 모두 자기들의 원수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동시에 스스로 하느님의
원수가 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겠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는 의리를
지키면서
그것을 이웃 사랑 실천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범죄자들이 자기들끼리 의리를 지키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46).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여러분은 성경을 많이 읽으시나요?
불경이나 경전은요?
책도 많이 보시나요?
그래서 아시는 것도 참 많겠지요?
가끔 성경공부를 많이하여 아는 것이 참 많고
남에게도 그럴싸하게 잘 가르치기도 하는데
정작 사는 걸 보면
아니올씨다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진 않겠지요?
사실 많이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실천하기 위한 것인데
그냥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머리로는 잘 알고
입으로는 잘 가르치는데
가슴이 따뜻하지 못하여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제대로 성경과
경전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손발이 먼저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입니다.
비록 말은 어눌하고 두서가 없을 수도 있고
머리도 약삭빠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인가요?
자, 오늘은 머리로 이것저것 따지고
말로 옳니 그르니 하지 말고
그냥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작은 힘을 보태주고
슬퍼하는 사람이 있으면 위로해 주고
실망과 좌절의 늪에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줍시다.
제발 좀 따지지 맙시다!
그냥 사랑합시다!
핑게 대지 맙시다!
그냥 '예' 합시다!
이웃이 되어 주세요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이웃사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고 이르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마더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찾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요나와 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