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수요일]예수님을 따르려면 (루카 9,57-62)

2015. 9. 30. 오전 7: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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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간 수요일]예수님을 따르려면 (루카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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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 무렵 크로아티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리스 말을 깊이 공부한 뒤 정부 관리로도 일했으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 성경』이 그것이다. 또한 성경 주해서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 저술을 남기고 420년 무렵 선종한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2-2]바벨론 포로시대와 귀환(성벼겅전건축,부림절,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역사)            [2-2]바벨론 포로시대와 귀환(성벼겅전건축,부림절,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역사)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를 모시는 고위 관리였다. 유배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어렵게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슬퍼하고 있을 때, 임금은 그에게 예루살렘에 돌아가 도성을 재건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한다.(느헤미야 2,1-8)
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이십년(BC455) 니산 달, 내가 술 시중 담당이었을 때, 나는 술을 가져다가 임금님께 올렸다. 그런데 내가 이제까지 임금님 앞에서 슬퍼한 적이 없기 때문에, 2 임금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어째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 네가 아픈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음의 슬픔일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3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 버렸는데, 제가 어찌 슬픈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 그러자 임금님께서 나에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하늘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5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리고 이 종을 곱게 보아 주신다면, 저를 유다로,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6 그때에 왕비께서도 옆에 계셨는데, 임금님께서는 “얼마 동안 가 있어야 하느냐? 언제면 돌아올 수 있겠느냐?” 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임금님께서 이렇게 나를 보내시는 것을 좋게 여기셨으므로, 나는 임금님께 기간을 말씀드렸다. 7 나는 또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관들에게 가는 서신 몇 통을 저에게 내리게 하시어, 제가 유다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이 저를 통과시키도록 해 주십시오. 8 또 왕실 숲지기 아삽에게도 서신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집 곁 성채의 문과 도성의 벽, 그리고 제가 들어가 살 집에 필요한 목재를 대게 해 주십시오.” 내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이 나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주셨다.


시편 137(136),1-2.3.4-5.6(◎ 6ㄴㄹ)
◎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눈물짓노라.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비파를 걸었노라. ◎
○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는구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을러대는구나. “시온의 노래를 불러라. 우리에게 한 가락 불러 보아라.” ◎
○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굳어 버리리라. ◎
○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소쟁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버릴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을 따라나서려면 지금까지 살아온 안정된 삶을 포기해야 한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기쁨과 행복의 길 [수체 예습] 수도생활이란? 2. 수도자는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이다

고령화 사회, 누구나 노후를 걱정합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소가 감소하면서 고령화 추세가 사회 전체보다 오히려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곳이 수도원이다 보니, 노후에 대한 염려는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이십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요. 그 당시 수도회에 입회하는 젊은이들은 노후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 당시 청빈을 서원하는 수도자는 안정된 미래를 예상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대에 따라 그리고 장소에 따라 수도원은 사회적 지위와 교육의 기회, 그리고 안정된 생활을 마련해 주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염려와 걱정을 넘어 불안해지기까지 하는 오늘날,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확실한 대책은 오리무중,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장을 받던 수도원이 이제 노후를 걱정하게 되었다는 현실이 어쩌면 오늘 복음에 더 합당하고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육의 기회를 얻으려고 수도원에 입회하는 이들의 경우, 공부를 마치면 떠나갑니다. 진정한 부르심도, 진정한 응답도 아니었던 것이지요. 모든 안전과 기득권을 계산하지 않고 오히려 포기한 뒤, 주님을 따라나설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추종이 될 것입니다.
머물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내 앞에 나타나시어 당신과 함께 떠나자고 하신다면 나는 과연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복음 환호송처럼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하고 응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려면>    송영진 모세 신부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여기서 '어떤 사람'이 바라는 것은,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라는 말은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따라다니면 편히 쉴 곳도 찾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될 텐데,
그래도 따라다니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정말로 힘든 생활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기가 꺾여서 포기하고 돌아섰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좁은 뜻으로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살다보면 정말로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직자가(수도자가) 되겠느냐?" 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넓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이고,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또 종교박해가 없더라도,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게 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1)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무슨 초인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로 사는 것도 그렇고, 성직자나 수도자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 자신이 지고 갈 수 있는 십자가만 주십니다.)


2)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하다보면 힘들 때도 있지만, 사실은 기쁨과 행복을 누릴 때가 훨씬 더 많고,
전체적으로 보면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십자가' 라는 말에서 '고통'만 연상하는 것은 고정관념입니다.


3)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은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힘들 때도 있고 편안할 때도 있는데,
목적지를 잊어버린다면,
힘들다고 포기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편안하고 좋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추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59-60)."


여기에 나오는 사람의 태도는 열두 사도의 태도와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루카 5,11).


여기서 '먼저 집에 가서' 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에" 라는 뜻입니다.
전체 내용을 볼 때,
'아버지의 장사' 라는 말은 실제 장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즉 신앙생활의 반대쪽에 있는 '세속의 생활들'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세속의 일들을 '먼저' 정리하고 신앙생활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 경우에 그 '나중'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영영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먹고살기가 바쁘니까,
은퇴하면 그때 가서 신앙생활을 하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은퇴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모의 장례도 치르지 말라고 막으신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라는 말씀은,
"세속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라는 뜻이 들어 있는
비유적인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죽은 이들이 죽은 이들의 장사를 지낼 수는 없으니,
표현만 보아도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겉으로만 보면, 세 번째 사람의 상황은 두 번째 사람의 상황과 거의 비슷한데,
사소한 세속 일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훨씬 더 강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세속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라는 정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네가 세속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 않는다면,
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무서운 경고 말씀입니다.
세속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는 일도 '십자가'에 포함됩니다.


39. 제목 :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함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른 새벽 창문 넘어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어느덧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가을은 이렇게 어김없이 친구가 되어 찾아옵니다. 가을은 우리를 시인이 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노란 은행잎을 보면서,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을 보면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우리는 인생을 이야기하고,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부님께서 언젠가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첫째, 단풍은 멀리서 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치악산에서도, 설악산에서도, 내장산에서도, 제가 살던 동네의 감악산에서도 단풍은 늘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볼 때 아름다웠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는 단풍은 많은 경우에 조금씩 상처를 입고 있었고, 색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경우도 많았고, 더러는 벌레를 먹어서 흠집이 있곤 했습니다.

둘째, 단풍은 그 단풍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여유가 있고, 아름다워야만 아름답게 보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지금 시련의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 이별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는, 지금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한 사람에게는 그런 단풍이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살아가면서 그런 경험을 자주합니다. 특히 도시의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부족하리라 생각합니다.

셋째, 단풍은 새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하늘의 구름과 조화를 이룰 때 더욱 아름답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동양화를 볼 때, 그런 것들을 자주 느낍니다. 산과 그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강물이 되고, 그리고 그 강가에 작은 배가 있으며, 배위에서 고즈넉이 낚시 대를 드리우는 노인이 있습니다. 이런 어우러짐이 어쩌면 동양화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넷째, 단풍은 햇빛을 받아야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단풍의 고운 색을 볼 수 없습니다. 단풍은 햇빛이 밝게 비추이는 때 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역사를 통해서 우리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많은 허물과 잘못이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허물이 있고, 잘못이 있고 흠잡을 곳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과 성령의 비추임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런 허물까지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의 기도와 전구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허물이 없고, 완벽한 관계를 기대하기보다는 허물이 있고, 부족함이 많이 있다하더라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성령의 비추임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좋은 말씀을 남겨주신 김자문 네레오 신부님과 죽은 모든 이들의 영혼이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수체 예습] 수도생활이란? 2. 수도자는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이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루카 9,60)

어제 대천사 축일에
모친께서 하늘나라에 오르셨습니다.
추석날까지 노래를 부르실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잠을 주무시다 돌아가셨습니다.
하루종일 조문객을 맞이하였지만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말씀묵상을 쉴까 생각하다
복음말씀이
못 쉬게 만드네요.

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장사는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일이기에
더이상 주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도
하느님 나라를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올려보내는 길입니다.
천사들과 함께 훨훨 오르소서.

세상 끝날까지
하느님 나라를 그리며
하느님 나라를 알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어머니를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먼저 가십시오. 어머니.

천사들의 모후이시여
송 베르다를 받아주소서. 아멘.




***Boney-M(보니엠)***

***Rivers Of Babylon(1978년곡)

***Boney-M / Rivers Of Babylon(뮤직 비디오)

 

[출처] 보니엠-바빌론의 강가에서|작성자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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