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먹보요 술꾼 (루카 7,31-35)
티모테오 1서는 사목자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교회는 하느님의 집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이다. 교회는 우리 신앙의 신비를 지키며, 밖으로는 그릇된 가르침을 배격하고 안으로는 신자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가르친다.(티전 3,14-16)
사랑하는 그대여, 14 나는 그대에게 곧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이 글을 씁니다. 15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16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그 옳으심이 성령으로 입증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시어, 온 세상이 믿게 된 그분께서는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따르지도 않고 당신도 배척하는 사람들을 보며 탄식하신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믿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은 지혜가 옳음을 드러낸다.(루카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 세례자 요한이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자, 사람들은 그를 괴팍하고 심지어는 마귀 들렸다고 거부하고, 예수님께서는 빵도 포도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드시니 먹보요 술꾼이라고 하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결국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더욱이 믿을 마음도 없으니, 어느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고 또 듣지 않겠다는 심보입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매사에 반항하는 때가 있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유익한 일을 하신다는 생각이 들어도 억지를 부리면서 이유 없이 불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꼭 마음에 들 경우에만 믿어야 할까요? 여러 종교들 가운데 가톨릭 교회의 교리가 마음에 들어서 믿으시는지요? 지난 며칠 동안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주어진 십자가가 싫지 않은 데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까지 하셨기에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인지요? 조금 복잡하지요. 분명한 것은, 진리니까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마음에 들어서 믿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인 우리이지만, 그분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말씀이지만 따르려는 생각도 마음도 없고, 지키고 싶지 않은 계명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소개하는 장터의 아이들처럼 진리를 내 취향에 맞추려고 하거나 억지로 심술을 부리고 싶은 충동을 떨쳐 버려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여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은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는 말씀으로 마감됩니다. 여기서 지혜의 자녀들이란, 곧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회개> 송영진 모세 신부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2)"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도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도 거부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회개 선포'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 따라서 회개도 거부하고 복음도 거부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회개를 거부하는 것은 세례자 요한 탓이고,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 탓이라고 핑계를 댔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 7,33-34)."
이 말씀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은 미친 사람이어서 그가 선포한 회개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예수는 죄인이어서 그가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라고 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만일에 세례자 요한이 그런 고행을 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면서 회개를 선포했다면, 사람들이 회개했을까?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멀리 떨어져 고행만 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면, 사람들이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을까?
세례자 요한은 '말로만'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삶으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철저하고 엄격한 극기고행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도 '말로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온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니까 '기쁨'을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내용을 '혼인 잔치의 비유'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하느님이)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초대에 응하기를 거부했고(마태 22,5), 어떤 사람은 초대를 받아들이기는 했는데 예복을 입지 않아서 쫓겨납니다(마태 22,11-13). 초대에 불응한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고,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회개'를 거부한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잔치 참석 자체를 거부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복을 입는 것도 거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복을 안 입어서 쫓겨난 사람의 경우에는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예복 입는 것은 싫어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예복을 입는 것은 좋아하지만, 잔치 참석은 싫어하는 경우도 있을까?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하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싫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를 보면, 사람들이 초대에 불응한 것은 눈앞의 세속적인 일 때문입니다(루카 14,18-20).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거부한 것은 세속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구원, 생명,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에서의 인생만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초대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는, 즉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바라지만,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나에게는 죄가 없으니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자만심.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예복을 안 입고 있는데 자기는 이미 예복을 입고 있다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바리사이들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으로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석한 것으로) 착각하는 기복신앙.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은 복을 많이 받는 방법만 알고 싶어 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회개하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누가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 "회개나 심판처럼 '듣기에 불편한 말'은 그만 하고, 복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만 말하여라." 라고 요구하는 일이 많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고 불편해 하는 말은 거의 안 하고, 복을 받아 누리는 방법에 대해서만 말하는 강사들이 인기를 얻고 유명해집니다.)
하늘나라가 아닌데도 하늘나라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즉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 아닌데도 하느님의 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늘나라가 아니라면 그 나라는 사탄의 나라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탄이 준 '화'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누리는 부귀영화는 '복'이 아니고 '화'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복음을 선포하실 때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사실 세례자 요한만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회개를 선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회개 선포'가 중단된 것은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계속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 선포는 사도들을 통해서, 또 교회를 통해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2)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르는가 봅니다.
요한이 와서 복음을 전해도
그 말을 새겨 듣고 회개하기는 커녕
옷 입은 게 맘에 안들고
너무 깐깐하다고 꼬투리를 잡더니
예수님은 편안하게
먹고 마시며 대중적으로 복음을 전하니
이제 먹고마시기만 한다고 투덜거립니다.
애시당초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고
회개할 생각조차 없었던 게지요.
이 본당신부님이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한다고 궁시렁거리고
저 본당신부님이 저렇게 하면
저렇게 한다고 뒷담화합니다.
그 신부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고
무슨 말씀을 주시는지에 대해선
새겨듣고 싶지 않은 게지요.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오늘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이래도 만족
저래도 만족해 보면 어떨까요?
불평불만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하는
가장 않 좋은 악습이고
감사와 만족함은
하느님 나라가 가깝다는 표시랍니다.
조재형신부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시는 교황님께서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낙태를 하였지만 진심으로 뉘우치는 여성들에 대해서 교회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혼하였지만 재혼을 한 신자들은 전에 하였던 혼인이 무효였다는 것을 밝히면 성사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황님은 혼인 무효 절차를 좀 더 간편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목의 현장에 있으면 혼인 무효 절차가 꽤 오래 걸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구의 법원에서 해결을 해야 하는데, 혼인 무효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고, 그것을 해결하는 신부님들의 수가 적기 때문입니다. 길게는 몇 년씩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신자들은 성사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교황님의 말씀처럼 혼인 무효 절차가 간편해 진다면 많은 분들이 신앙 안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 법원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교황님의 말씀을 따라서 앞으로 혼인 무효 절차는 간편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다녀온 것 같은 삶을 사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확신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직책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분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 순수한 마음이 있으면 이미 시작된 하느님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나라를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얻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있을 때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매일미사 참례를 정성껏 준비하는 분, 장례가 나면 먼저 가서 고인을 위해 연도를 바치는 분,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함께 나누시는 분, 본당의 피정과 교육에 빠짐없이 참석하시는 분, 이웃을 험담하기 보다는 잘못을 뉘우치도록 기다려주고 기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