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참 행복 선언 (루카 6,20-26)
콜로새서 후반부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새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지만 현세적인 것들을 따라 살지 않는다.(콜로 3,1-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6 이것들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이러한 것들에 빠져 지낼 때에는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8 그러나 이제는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루카 복음에는 행복 선언뿐만 아니라 불행 선언도 들어 있다. 현세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는 데에 만족하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았다.(루카 6,20-26)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새로운 생명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라고 촉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지상에 머물고 있는 우리가, 천상의 것들만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또한 가난한 사람들도 도와주고 착한 일도 조금 하면서, 어느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여 웃으며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그저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에서 가장 길게 서술되어 있는 마지막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웃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복음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바른말을 하는 사람을 박해한다면, 더욱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을 모욕하고 중상하는 그런 세상이라면, 그러한 세상의 논리와 셈법에 따라 동조하면서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은 채, 눈앞의 편안함만을 찾고 거기에 만족하면서 안주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겠지요. 콜로새서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이들은 “저 위에 있는 것을” 무시하고 “현세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두고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관심과 사고와 운신의 폭이 오로지 나와 내 집안뿐이고, 그나마 현세적 행복에만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 뵈어야 할 순간이 다가올수록 예수님의 불행 선언에 담긴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더 높은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이 손가락질하면서 거부하거나 박해를 하더라도, 그래서 울고 불행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참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 송영진 모세 신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행복의
원인은 '가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은 '가난해서' 행복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아무나
그 나라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은, 물질적인
부유함을 추구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하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불행
선언'에서 불행의 원인은 부족한 것도 아쉬운 것도 없는 상태, 그래서
따로 위로를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 즉 '부유함'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부유해야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될까? 하느님께
청할 것이 없을 정도로 부유하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이것은
재산이 많다는 것보다는 하느님의
위로를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오만함'에 관한 문제입니다. 자기가
지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만 잘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느님
나라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하느님도 예수님도 필요 없고, 종교와 신앙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웃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자기의
영혼이 구원 받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오만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지금
부자로 사는 사람들을 모두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만 편애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부자들에게는
회개하라는 경고 말씀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인데, 사실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에는, 하느님
나라에는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부족한 것 없이 살게 되는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남들보다 더 가난한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가난해도
하느님 나라만 생각하면서 그냥 참고 살아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난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선'입니다. '가난과
굶주림'은 극복해야 할 '악'입니다. 빈부
격차도 '악'입니다. '악'을
그냥 방치하고, 참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쳐서 없애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저절로
얻게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함께 노력해서 만들어 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루카 6,25)."
이
말씀에서 행복의 원인은 '희망'입니다. 굶주림이
행복일 수도 없고, 슬퍼서 울고 있는 상황 자체가 행복일 수도 없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있어도 나중에 배부르게 될 것이라는 희망, 지금은
슬퍼서 울고 있어도 이 슬픔은 곧 끝날 것이고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 그
희망이 지금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불행의 원인은 '지금'의 배부름이고, '지금'의 웃음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않고 지금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만족하고 있는 그 상태가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좋은 예가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이승에서의
인생만 보면, 부자는
행복하게 살았고, 라자로는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라자로 같은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불행
선언은 그 부자 같은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라자로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라자로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부자 같은 사람들의 '회개'입니다. (우리
자신의 회개도 당연히 필요하고.)
부자들의
것을 '폭력으로' 빼앗아서 라자로 같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그것은
공산주의입니다. 부자들이
회개해서 자기들의 재산을 모두 내놓고, 그것을
모두가 나누어서 라자로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 그게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부유한 사람들의 이기심과 가난한
사람들의 부자에 대한 증오심의 산물입니다. 이기심과
증오심에서 생긴 사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하느님 나라와 가장 가까웠던 모습은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2-34)."
행복하여라, 가난한 이들!(루가 6, 20-26)
오늘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인가를 말씀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늘 우리에게 빛이다. 즉 우리가 어떻게 살면 행복하게 되고, 불행하게 되는 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계시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이 밝혀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밝혀주는 복음을 알아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반드시 모든 인간이 알아야 할 진리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이고, 그 진리의 길을 살아갈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복음을 모르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신앙인들은 이런 새로운 진리를 알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행복한 곳으로 가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인지를 잘 모르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알고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참된 인생의 길을 안내 해주고 보여주는 빛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을 증거하는 증거자들인 것이다.
하느님이 밝혀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전혀 낮선 삶이며 새로운 길을 걷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일반인들의 가치관과 행복관은 인간적인 사고, 인간적인 지식과 이 세상에 국한된 사고 안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 행복관은 하느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깨닫게 된 새로운 세계요, 새로운 가치관이요, 행복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五福)이라는 것이 있다.
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이다.
수는 장수하는 것이요, 부는 재물이 풍부한 것이요, 강녕은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이요,유호덕은 도덕 지키기를 낙으로 삼는 일이요, 고종명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행복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재물을 축적하려고 하고, 장수하기 위해서 몸에 좋다는 약이나 건강 식품을 찾아 먹는다. 몸에 좋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먹는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나 이런 행복관도 시대에 따라서 변화한다. 요즈음은 도덕을 지키는 유호덕이나 제 명대로 사는 것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기고 누리며 사는 삶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아무튼 시대에 따라 가치관과 인생관도 변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관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시한 행복한 이와 불행한 이에 대한 가르침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큰차이가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한 이들 즉 가난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 우는 이들,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을 당하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신 부유한 이들, 배부른 자들, 웃는 자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불행하다고 말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왜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고 또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했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가치관이나 행복관이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관과 불행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고 바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행복관 즉 많은 재물, 우리의 건강, 장수 등일 것이다.
또 우리가 기도를 하더라도 그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건강을 위해서, 재물을 풍부히 갖을 수 있도록, 출세를 위해서, 편한 마음으로 오래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님이 제시한 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럼 간단하게나마 예수님은 왜 가난 이들, 굶주린 이들, 우는 이들, 모욕을 받는 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하셨는가?.
"행복하여라"는 말이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다. 그냥 행복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한 이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이 행복한 이들인지를 지적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제시한 행복관은 영적인 차원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즉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제시해준 것이다.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존재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려면 무엇보다도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란 나약한 사람, 청하는 사람, 구걸하는 사람, 의탁하는 사람을 말한다.
영적인 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것을 청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한다. 부자는 이런 것을 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배부르기 때문에 청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굶주리는 이들이란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것에 굶주린 사람을 말한다. 우는 이들이란 영적인 것을 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자기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뉘우치고 우는 이를 말한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쫓아냄과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란 올바른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편 불행한 사람이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칸트는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가인 에카르트는 "하느님께 도달하는 과정은 영혼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은 그 무엇을 털어내는 것이다"라고 했고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병고와 가난이다."라고 말했다.
-유 광수신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콜로 3,2)
여러분은 하늘을 많이 쳐다보시나요?
요즘같이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고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여러분은 땅을 많이 쳐다보시나요?
땅에 자라나는
온갖 풀과 꽃, 벌레들은
생명의 신비를 보여주니
보고 있기만해도
즐겁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오로는
하늘을 쳐다보라네요.
땅은 그만 쳐다보고...
하늘을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희망의 사람입니다.
땅을 쳐다보는 사람은
실망과 좌절로
고개를 떨구는 모습입니다.
세상이 설혹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하시는가 봅니다.
오늘은
하늘을 더 많이 쳐다봅시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그리며
꿈꿔봅시다.
[출처] 2015.09.09.|작성자 알타반
2015년 9월 9일 이상욱엘리야 모친 엠마(87세) 장지수행(용인 천주교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