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토요일]안식일의 주인 (루카 6,1-5)

2015. 9. 5. 오전 7: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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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토요일]안식일의 주인 (루카 6,1-5)

예수님일생포스트 .예수님의 일생을 그림으로 표현해봤어여!

콜로새 신자들은 과거에 이교인들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들과 화해하시어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다. 이제 그들은 믿음을 기초로 복음의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콜로새서  1,21-23)
형제 여러분,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3 다만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밀밭 사이로-2

시편 54(53),3-4.6과 8(◎ 6ㄱ)
◎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
○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    

  

마태오 제 12장 1절 - 50절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지적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말씀하신다.(루카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과 밀밭

안식일과 관련하여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충돌하는 장면이 복음서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안식일 계명을 고집하는 바리사이들이 아주 완고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사실 안식일 계명에는 대단히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느라고 바빴던 일상을 멈추고, 그동안 잊고 지내기 쉬운 하느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제정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또한 안식일은 기계처럼 일에 매여 있는 자기 자신과 이웃, 특히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라도 노동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안에서 쉬면서 인간다운 모습을 되찾고 누리도록 도와주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 계명에서 중요한 것은 그날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주님의 날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때에 오실 메시아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시고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점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 안식일에 기억해야 할 그분이심을 뜻합니다.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안식일에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추수를 하건 탈곡을 하건 다른 것은 모두 부수적인 일일 뿐입니다. 우리의 주일은 어떻습니까? 오직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고맙고 즐거운 휴일, 아니면 주님의 날인지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시어, 우리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해 주셨기에, 우리의 안식일은 그분께 감사드리면서 지내는 주님의 날이어야 하겠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송영진 모세 신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루카 6,1). 마태오복음을 보면, 그들이 그런 일을 한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심심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예수님도 무척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행동을 본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겁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루카 6,3-4)"

이 말씀은, "다윗이 율법을 어긴 것은 분명하지만, 배가 고픈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는 다윗은 비난하지 않으면서 왜 내 제자들은 비난하는가?"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예수님 말씀의 뜻은, "제자들의 행동은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이다."가 아닙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맞지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먼저 그들의 사정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2) 다윗이 배가 고팠을 때 했던 행동을 말씀하신 것은, 지금 제자들의 상황도 그렇게 딱한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얼마나 굶었는지 모르지만, 율법을 어길 정도로, 또는 율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율법을 몰랐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을 알고 있었지만 배고픔을 참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3)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한다고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마태 12,7).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지만 '죄 없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어겨도 죄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 경우를 '부득이한 사정'이라고 부릅니다.

4) 그러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율법을 마음대로 어겨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어겨도 죄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라는 말과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율법을 어겨도 된다." 라는 말이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말'입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못 지킨 것과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5)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판단하고 단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 권한은 하느님만의 고유 권한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만일에 우리가 남을 함부로 심판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을 침해한 우리의 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6) 그러나 형제로서 충고하고 권고하는 일은 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4)." 지금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 것은 충고가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 두 가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사랑으로 하는 말이라면 충고가 되고, 자기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랑 없이 비난만 하는 것이라면 심판이 됩니다.)

7) 심판은 일방적으로 하는 일이고, 충고는 당사자의 사정을 충분히 들어준 다음에 하게 되는 '사랑 실천'입니다. 사정을 들어보고 너무 딱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당연히 도와주게 될 것입니다.너무 배가 고파서 율법을 어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음식을 줄 것이고, 너무 아파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병원에 데리고 갈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8) 사정을 알아보니 율법을 못 지킨 것이 아니라 안 지킨 것이었다면,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꾸짖거나 타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사랑으로' 해야 하는 '사랑 실천'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미움'은 안 됩니다.

9) 그런데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것은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율법을 어겨도 죄가 안 될 정도로 배가 고프다는 것은 누가 판단하는가? (병자들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을 만큼 몸이 아프다는 것은 누가 판단해야 하는가?)

우리는 남의 사정에 대해서 잘 모를 때가 많고, 또 남의 사정을 함부로 판단해도 안 되고, 그러니 그런 판단은 당사자 자신이 '양심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고픔을, 또는 아픔을 참을 수 있었는지, 참을 수 없었는지, 그 판단은 당사자 자신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0)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배고픈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사정을 모르면서, (사정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보고 제자들을 비난했고, 심판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서 제자들의 사정을 알게 된 다음에도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면, 진짜로 안식일을 어긴 것은 바리사이들입니다. 안식일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날인데(루카 6,9) 안 했기 때문입니다.


밀밭의 하루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루카 6,1)

요즈음은 큰일 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어릴 적에
소위 '서리'라는 것을 해 보셨나요?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다 해 보셨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먹을 것이 귀한 때라
이것저것 훔쳐 따먹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요.

저는 국민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자두밭에 서리하러 갔다가
친구들은 다 내빼고
어리숙하게 붙잡혀
나무에 묶여 혼줄이 난 적이 있답니다.
또 학교 실습지에서
무를 뽑아 먹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무를 입에 물고 벌을 선 적도 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나는
아름다운 옛 추억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늘 밀서리를 하다가
혼줄이 나네요.

그런데 예수님은
혼을 내시기보다는
우리 아버지처럼 변호해 주시네요.
재미로 하는 서리인데
뭘 그러냐고...
이보다 더 한 서리도
얼마나 많은데...

예,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꾸짖기보다는
우리 편에 서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랍니다.

오늘 설혹 누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처럼 너그럽게 변호해 줍시다.
그래야 나도 잘못하거나
실수하게 될 때
너그러이 변호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요.

[출처] 2015.09.05.|작성자 알타반

안식일의 주인(막 2:23-28) ^.^

배가 고파서 (마태 12,1-8; 루카 6,1-5)  -故유광수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이의를 제기할만도 하다.  

왜냐하면 율법규정을 곧이 곧대로 지키는  것을 생명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온 바리사이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하다.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일(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은 해서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이 분명하다. 이런 원칙을 세워 놓고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도 삶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기준이 없을 때 혼동이 오고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혼동이 올 수가 있다. 그러나 삶의 원칙을 정해 놓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고 정말 우리가 지켜야할 삶의 원칙은 어떤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은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 인간이 법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즉 법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고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 어떤 특정인만을 위해서 또는 인간을 법이라는 굴레에 메어 놓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선을 위해 만들어 놓은 법이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공동선을 해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런 일은 법을 만들어 놓은 본래의 취지를 잘 못 알거나 공동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인만을 위해 잘못 이용될 때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인간이 만든 법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해야 하고 올바른 해석이 뒤 따라야 한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 하더라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게 되면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악법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이의를 들으시고 그들의 이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그래서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레위 24,8과 민수 28,8-9에 나오는 내용을 들어 설명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예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인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로 바리사이들이 이의에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의 잘못은 인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본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무시하거나 죄없는 이들을 단죄해버리는 어리석은 일들이 얼마나 우리 생활 속에서 자주 일어나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 1-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그것이 잘한 일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이 잘한 것인지 아니면 잘 못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만 설명해주셨을 뿐이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의 행동에 가장 큰 잘못은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보다는 법을 우선시 하였다는 것이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들이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사랑의 법이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는 법은 없고 사실 사랑의 법보다 우선시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단 한 가지의 법만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법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코전 13, 1-7)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행동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를 올바로 알아 들을 수 있다면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은 안식일에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한 것이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라는 말은 단순히 밀 이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밀 이삭이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 미사 참례 때에 밀떡으로 만들어진 성체를 받아 보시듯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성체를 받아 모셨다는 것이다. 

 

한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였다."는 것은 주일에 성체를 받아보시지는 않고 다시 말해서 주일 미사참례는 하지 않으면서 미사 참례하는 다른 사람들을 잘못했다고 판단는 하는 행위를 하고 있으니 그들이야 말로 안식일에 해야할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주님을 모시는 일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야 말로 안식일(주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주일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 대해서 배가 고픈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먹어야 한다. 매일 먹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주일만이라도 주님을 먹어야 한다.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표현은 성체성사를 표현하는 언어이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는 늘 주님에 대한 배고픔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주님을 먹어야 한다.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낀다는 것은 제자들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주님의 제자이면서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전혀 주님에 대한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는데 어떻게 주일 미사를 기다릴 수 있으며 말씀을 일고 묵상할 수 있겠는가?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는 사람만이 아침 저녁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주린 배를 채우고 목마름을 해갈시킨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마태 5, 5)리하고 진복팔단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목마름이 해갈 되지 않는다. 오늘 부터라도 우리가 진정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나를 안식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또 나 자신이나 주위 환경도 아닌 바로 사람의 아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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