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권위와 힘 (루카 4,31-37)

2015. 9. 1. 오전 7: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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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권위와 힘 (루카 4,31-37)

하느님 모상(Imago Dei)이란 무슨 뜻인가 - 하느님 뜻 따를 능력 소유함 의미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종말이 언제 올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거듭 밝힌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살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그분과 함께 살 것이다.(테살로니카 1서  5,1-6.9-11)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적으로 하늘 나라를 선포하신다.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권위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다.(루카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미사곡] 309. 하느님의 어린양


종말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바로 구원의 때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날이 올까 두려워하면서 걱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이 오지 않아 믿음이 흔들렸다는 표현이 더 옳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피지도 못하고 시든 꽃처럼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완전히 꽃피게 되리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희망 속에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누리도록 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종말은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때이므로 그 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신약 성경의 마지막 말씀은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이라는 간청으로 끝납니다.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도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경이롭게도 우리의 성경은 그 기다림으로 끝납니다.
그 시간과 그 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날은 밤도둑처럼, 진통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마지막 때”(1요한 2,18)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마지막 순간이 앞으로 수십 년 뒤에 닥쳐올지, 아니면 수만 년 뒤에 닥쳐올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종말의 때, 마지막 때라는 특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특히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개인적인 죽음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점을 숙고하더라도, 우리는 마지막 때,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반영억라파엘 신부 강론


<마귀>   송영진 모세 신부


9월 1일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4장 31절-37절,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 있는 말씀"이고, 그 권위는 마귀들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권위' 라는 것을 전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을 마귀들에게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오신 분이라는 것도 전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셨는데(루카 4,17-19),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실제로 이루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실제로 구원과 해방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것은 마귀의 억압을 받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그 사람을 마귀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마귀 들릴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아무래도 '저항력'이 약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마귀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저항력이 약한 것이 자기 탓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떻든 평소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서 마귀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과 마귀 들리는 것은 다릅니다. 유혹은 스스로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잃는 일은 아닙니다.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자기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 들리는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자유의지를 잃는 일입니다. 그래도 마귀의 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과 마귀 들리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방'이라는 것은,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해방을 원해야 하고, 해방과 자유가 온전히 자기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마귀들을 쫓아내셨을 때(루카 8,32-33), 그 지방의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요구했습니다(루카 8,37).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크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루카 8,37), 이 말은, 그들에게는 예수님보다 마귀들이 덜 두려운 존재였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귀들과 함께, 또는 마귀 들린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뜻도 됩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자유를 마귀들의 억압보다 더 부담스러워 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외치는데, 해방과 자유보다는 다른 것을 더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들, 아니면 어떤 쾌락 같은 것들...예수님 덕분에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해방과 자유를 빼앗기지 않는 일입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24-26)."

악령(마귀)에게서 벗어났다면 성령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만일에 악령이 떠난 뒤에 비어 있는 채로 놓아둔다면, 즉 성령과 함께 살지 않는다면, 더 강하고 더 악하고 더 많은 영들에게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멀어질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자유는 죄를 지어도 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버리고 마귀의 억압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어리석음입니다.

9월 1일의 복음 말씀에서 한 가지 더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장소가 '회당'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마귀가 있었다는 것. (정확하게 표현하면 회당에 '마귀 들린 사람'이 있었던 것이지만, 사실상 마귀가 회당에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도 없고, 활동하지 못하는 시간도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귀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기도할 때에도 마귀는 우리를 유혹할 수 있고, 미사와 기도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방심하면 안 되고, 미사와 기도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방심하고 자만하다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을 때 생길 수도 있는 일들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2월7일 [청주]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 반 영억 신부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1테살 5,11)

올 여름 유난히 더워서
많이 힘드셨지요?
이제 가을이 시작되는
9월입니다.
제법 하늘도 높고 깨끗한 날이 많고
아침저녁으론 선선하니
참 좋습니다.
밤송이가 영글어 가고
논에 나락이 여물어 가니
가을이 참으로 시작되나 봅니다.

9월 시작과 더불어
상쾌한 나날 꾸미시길 빕니다.

바오로 사도는
9월 첫날에
이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그 길을 제시해 주네요.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해 봅시다.
서로 힘들게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고
남을 깎아내리려 하지 말고
남이 성장하도록 도우라네요.
그리 하실꺼죠!

[출처] 2015.09.01.|작성자 알타반


희한한 능력

   권위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9월의 첫날입니다. 예전에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 소주 처음처럼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도 맨 처음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국 사람은 술의 이름도 그렇게 처음처럼이라고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외국 친구가 한국 사람들은 술의 이름도 영성적으로 정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참 좋은 말입니다. 9월의 첫날입니다. 처음처럼 새롭게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권위라는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권위는 직책에서 오기도 합니다. 군에서는 계급이 권위의 상징입니다. 조직 폭력배의 세계에서도 권위는 바로 서열에서 시작됩니다. 성직자들도 비슷합니다. 본인의 직책이 곧 권위일 때가 많습니다. 권위는 지식에서 오기도 합니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권위의 시작입니다. 의사, 판사, 건축사, 회계사와 같이 특정 분야를 많이 아는 것은 권위를 드러냅니다. 권위는 재산에서 오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곧 권위이기도 합니다. 돈으로 못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바람, 적당한 햇빛, 알맞은 비가 내리면 곡식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좋은 것을 보고, 따듯한 말을 듣고, 사랑을 받으면 닫힌 마음이 열리기 마련입니다. 신학생 때 예수님의 권능과 권위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형태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감탄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크게 4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연의 힘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물위를 걷기도 하시고, 풍랑을 잠재우기도 하십니다. 자연을 제어하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가장 많이 보여 주신 치유기적입니다. 예전에는 치유란 나쁜 영을 제어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소경, 앉은뱅이, 중풍병자, 나병환자, 열병환자, 하혈하는 여인 등을 치유하였습니다. 이 또한 신적인 능력으로 생각되는 힘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는 기적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빵의 기적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게도 하셨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도자는 백성들을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힘을 보여주셨습니다.

네 번째는 소생기적입니다. 나자로의 소생, 죽은 소녀의 소생입니다. 이와 같은 기적의 힘이 예수님 권능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기적은 현대 자본의 힘으로 ,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공학, 유전공학과 같은 학문은 자연의 질서에 도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권능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도 그렇습니다. 놀라운 기적, 치유, 눈부신 발전은 신앙이 드러나는 열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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