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4일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마태19,3-12)

2015. 8. 14. 오전 7: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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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4일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마태19,3-12)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영적전쟁(2) -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전투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마쳤다. 이제 그들 모두는 스켐에 모여, 아브라함 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본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해 주시고 그들에게 땅을 주셨음을 기억한다.(여호 24,1-13)
그 무렵 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2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3 그런데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 온 가나안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사악을 주고, 4 이사악에게는 야곱과 에사우를 주었다. 그리고 에사우에게는 세이르 산을 주어 차지하게 하였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5 나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집트 가운데에서 그 모든 일을 하여 그곳을 친 다음,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6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렇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 뒤에 너희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이 병거와 기병을 거느리고 갈대 바다까지 너희 조상들의 뒤를 쫓아왔다. 7 그래서 너희 조상들이 주님에게 부르짖자, 주님이 너희와 이집트인 사이에 암흑을 갖다 놓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들을 덮쳐 버렸다. 이렇게 내가 이집트에서 한 일을 너희는 두 눈으로 보았다. 너희가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8 나는 너희를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데려갔다. 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으나,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어,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패망시킨 것이다. 9 그 뒤에 모압 임금, 치포르의 아들 발락이 나서서 이스라엘에게 맞서 싸웠다. 그는 너희를 저주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왔다. 10 그러나 나는 발라암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희를 발락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11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서 예리코에 이르렀을 때에는, 예리코의 지주들, 곧 아모리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다. 나는 그들도 너희 손에 넘겨주었다. 12 나는 또 너희보다 앞서 말벌을 보내어,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13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시편 136(135),1.2.3.16.17.18.21.22.24
◎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
○ 신들의 하느님을 찬송하여라. ◎
○ 주인들의 주님을 찬송하여라. ◎
○ 사막에서 당신 백성을 인도하셨네. ◎
○ 힘센 임금들을 내리치셨네. ◎
○ 뛰어난 임금들을 죽이셨네. ◎
○ 그들 땅을 재산으로 물려주셨네. ◎
○ 당신 종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주셨네. ◎
○ 원수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네. ◎     


오늘 결혼하시는 분들 계시죠??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 규정에 따라 아내를 버릴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창세기의 말씀을 토대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본디 계획을 일깨워 주신다.(마태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BGM/염장주의] 결혼해줄래요?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혼인에 대한 말씀도 독신에 대한 말씀도 그러합니다.
혼인하면서 부부가 서로에게 사랑과 존경을 약속하지만, 죽는 날까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있을까요? 모세 시대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해서 모세가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혼인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도 그들에 못지않습니다. 자녀가 결혼을 하면 안심이 됩니까, 걱정이 앞서십니까? 창세기에 기록된 하느님의 계획은 머나먼 이상처럼 보입니다. 적지 않은 신자 부부도 오직 신앙의 힘으로 주어진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독신으로 사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신을 약속한 이들 모두가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은 단순히 결혼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이가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을까요?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혼인이나 독신에 대한 충실함이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 시대 사람들의 약함을 인정했습니다. 충실치 못한 인간의 약함을 탓하기보다, 오늘 하루 내가 성실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질그릇 같은 저는 오늘 하루만, 내일도 하루만, 매일같이 그렇게 하루마다 독신 서약을 갱신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느님께 약속한 바를 철저하게 지키고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받은 것을 열렬히 갈망하면서……!  
   


[결혼비용] 애매한 결혼비용 분담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끝까지 붙어사세요 반영억신부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8.3%로 나타났습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성격 차’'경제적 이유'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몰아 부치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등을 돌립니다.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을 하였습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 받고 존경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 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됩니다”(1고린7,10-11).


서로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영애씨 친구에 든든한 아들래미의 결혼 축하해주세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여러분은 이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즈음 젊은이들의 이혼이 급증하고
소위 '황혼이혼'이란 신조어도 생겨났으니
살다가 영 안 맞으면 헤어져야지 어떡하겠냐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니면 여전히
이혼은 '절대불가'라 여기십니까?

요즈음은 대세가
전자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혼이 아니라 결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맺어주신 천생연분이라 여기고 결혼을 한다면
살다가 이런저런 어려움이 닥쳐도 그나마 견뎌나갈 힘이라도 있을텐데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생각보다는 이런저런 조건과 스팩을 따져보고
나에게 유리한가 아닌가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조건적이고 계약적인 결혼이라면
그 조건과 계약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쉽게 헤어지는 수순을 밟지 않을까요.

결혼하셨습니까?
그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우자를 바라보십시오.
아직 결혼 안 하셨다면
조건보다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인연인지 아닌지를 깊이 성찰하고
그런 인연이라면 결혼하고
그렇지 않다면 홀로 사십시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포기하는 것이랍니다.

[출처] 2015.08.14.|작성자 알타반


Re:[부산웨딩부산결혼]-미소짓는 결혼 프리지아웨딩입니다

결혼과 이혼 (마르 10, 1- 12)   -유 광수신부-


 그런데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하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돌아 와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왜 이혼이 허락할 수 없는 것인 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천지창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해 주신다. 결혼과 이혼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혼은 안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고 따라서 인간은 오직 그 법을 따라야 할뿐인 하나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나의 존재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나의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관계를 이해하는데 그리고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기본적인 원리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에서부터 모든 문제는 풀어 나가야 한다. 내가 창조주처럼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피조물이라는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 


두 번째 원칙은 사람은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찾아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다. 부모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감사드려야 할 분이시기는 하지만 한 몸을 이루어 함께 사랑을 나눌 짝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부모를 떠나 자기 짝을 찾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다. 즉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에 의해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인 것이다. 사랑스런 자식이 부모를 떠나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순리를 막을 수는 없다. 이 순리를 막는 것은 부모에게나 자식에게나 불행한 일이다. 자식은 어차피 부모를 떠나 자립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떠남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떠남은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진행되다가 사춘기의 격변기를 거쳐 결혼기가 되면 짝을 찾아 부모를 떠나 자기들만의 둥지를 틀고 자리 잡는 것이다.


남녀가 부모를 떠남은 자기 짝과의 결합을 위한 것이다. 혼인 예식서에 보면 혼인 계약문이 있다. "나---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고 되어 있다. 이것은 두 사람과의 계약이다. 즉 결혼의 내용은 어디에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나는 당신을 사랑과 존경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과의 약속이면서 또한 하느님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즉 당신을 내 아내로 남편으로 결합하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이 계약은 서로에게 주는 결혼 선물인 것이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더 이상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결혼생활이란 죽을 때까지 이 약속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도 하느님의 역사이셨고 또 그와 짝을 찾아 짝지어 주시는 것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십억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단 한 사람의 자기 짝을 선택하는 일이 어찌 인간의 일인가? 고무신도 다 제 짝이 있듯이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에게 맞는 짝이 있다. 하느님이 창조 때부터 짝지어 주신 짝이 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누가 나의 짝인지는 오직 창조하신 분만이 아신다. 우리는 짝을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한다. 인연이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즉 전생에서부터 둘이 짝이 되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이다. 즉 서로의 짝을 만나게 해주신 분은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하신 일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맺어 주신 결혼을 인간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결혼은 하느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혼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원인을 들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서로간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에서 하느님은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셨다. 하느님은 원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우리 모습을 닮은"인간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 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깨어진 것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창세 3, 5)되고자 하는 탐욕으로 따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혼인성사는 탐욕으로 잃어 버렸던 하느님의 모습을 원상시켜 주는 것이다. 즉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더라!" 고 하셨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주신 것이다. 그 모습은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의 모습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라는 말에는 남자만도 아니고 여자만도 아닌 남자와 여자가 포함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결혼은 남자만의 것도 또는 여자만의 것도 아닌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혼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이 원초적인 공동체를 피괴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부부간에 서로의 계약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혼인 계약서에는 "나는 평생동안 언제나   ..... 신의를 지킬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남자와 여자가 공동으로 지켜야 할 의무이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혼은 서로가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데에서 빚어지는 불행이다. 대부분의 이혼은 "우리"라는 개념이 없이 마치 아담과 에와가 하느님과 같아지기 위해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었듯이 "너는 나의 것"이라는 일방적인 소유욕에서 빚어진다. 그 누구도 상대방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누구에게 예속되어져서는 안 된다. 서로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그래서 "너"와 "나"의 두 인격이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면서 하느님을 닮은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라는 단위는 하나의 공동체를 말한다. 인격 공동체인 가정은 최초의 인간 사회이다. 인간 사회는 친교의 사회이다. 친교는 서로 나누는 것이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갖은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이혼은 하루 아침에 오는 것이 아니라 친교가 없는 삶이 계속되었을 때 오는 하나의 결과이다. 따라서 이혼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의 친교를 통해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너"라는 두 인격체가 하나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할 작업인 것이다.


고전) 결혼그림  하느님 사랑 공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조재형신부

정부에서는 오늘, 814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이유는 광복 70주년이고, 15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이랍니다. 메르스의 여파로 국내 경기가 많이 위축되었는데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면 소비가 늘어나고,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인들은 유급으로 하루를 쉬게 해 준다면 싫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14일이 공휴일로 지정되면 여름의 마지막 휴가를 알차게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장을 가동해서 물건을 생산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하루 쉬는 것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임시 공휴일로 지정을 했지만 많은 중소기업은 쉬는 것이 녹녹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생각도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저는 문득 생각합니다. 작년 814일에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814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면 교황님 방한 1주년을 기억하면서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 예비신학생들과 고3 예비신학생들은 이제 곧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피정을 하면서 면담을 하였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명문대학교를 나왔고, 좋은 직장을 다녔지만 사제의 길을 가고 싶어서 예비신학생이 되었습니다. 본인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고, 착실하게 준비를 하였기 때문에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고, 본인의 의지도 확실한데 성적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주위의 권유도 있었고, 막연하게 사제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예비신학생이 되었습니다. 면담을 하면서 좀 더 확실한 의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재능이 있고, 확고한 의지도 있고, 기도생활도 충실하게 하지만 아직 신자가 아닌 부친 때문에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들보나 기둥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는 소용이 없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는 살쾡이만 못하다.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 벼룩을 잡고 털끝까지 헤아릴 수 있지만, 낮에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분쟁과 문제들은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때로 갈등하고, 다투는 것은 존재와 소유를 혼동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잠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 동양문화의 盡人事待天命과 비슷한 말입니다. 나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편견과 선입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된 것들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정한 여인을 향해서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들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떠났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혼한 사람들, 재혼한 사람들도 모두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분들을 단죄하기 전에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시고 용서를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연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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