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9일[성녀 마르타 기념일] (요한 11,19-27)
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시는 것으로 드러났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른다.(요일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요한 1서의 말씀과 같이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심을 고백한다. 마르타는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심을 믿는다.(요한 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자주 초대할 정도로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오늘 복음을 통하여 중요한 계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표징 앞에서, 사람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다. 요한 복음의 표징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가장 중요한 표징인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머지않아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요한 11,53 참조). 그들은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따라갈 것을 두려워하여 이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었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표징을 통하여 그 믿음을 확인받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계기가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르타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마르타는 그분을 뵙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았으며 그분을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에 속하는 이들이 더 많을까요?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할까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읽을 때에,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음을 느끼는지요? 우리가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을 요한 1서는 제시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거나 깨달은 것이라고 일러 줍니다.
<생명의 주님>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일부러'
가지 않으셨다가, 그가 죽은 뒤에 가십니다(요한 11,1-7). 마르타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1-22)."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이라는 말만 보면, 마르타가
예수님을 원망하고 비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에 한 말을 보면, 마르타는 흔들림 없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한 말은 이런 뜻입니다. "저는
제 오빠가 죽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제 오빠를 데려가신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는 말은, 마르타의
인간적인 희망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청하시든지 청하지 않으시든지 간에 주님을
믿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를 보면 마치
'동문서답' 같은 느낌을 주는데, 동문서답은
아니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나오는 중요한 대화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에게
'생명에 대한 권한'이 있다는 선언이고, 종말에
부활시키는 권한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을 '지금' 살릴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선언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바탕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은 사람들에게
그 권한과 권능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는 일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내어주시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타가 신앙고백을 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이
신앙고백은 베드로 사도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는
신앙고백과 같은 뜻이고, 동등한 가치가 있는 고백입니다. 마르타가
원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라자로가 지금 당장 살아나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고 청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외에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마르 5,42), 어떤 과부의 외아들(루카 7,15), 베드로
사도가 살린 타비타(사도 9,40), 바오로 사도가 살린 에우티코스(사도 20,10). 그런데
이 이야기들을 보면 우리가 흔히 무심코 지나치는,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1)
아무도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 자신이 청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도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예외적으로
야이로의 딸의 경우에만 야이로가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태 9,18), 그것은
마태오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는 딸이 죽기 전에 예수님께 와서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5,23; 루카 8,42).
2)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자신의 반응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자로를
비롯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당사자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는지,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되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고 그
일을 본 사람들이 기뻐했고, 믿게 되었다는 말만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당사자들의 증언이 아니라,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3)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더 오래 살았는지 신약성경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몰라서 못 적은 것이 아니라, 중요하지 않아서 안 적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했다가, 되찾고 기뻐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일을 겪으면서 살고 있고, 큰
슬픔과 절망에 빠지는 일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신앙생활의 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믿음만으로는
극복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슬프고 아픈 일입니다.) 너무
슬퍼서 믿음이 흔들릴 때에 필요한 것은 바로 '더 깊은 믿음'입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분에 대한 믿음. 말장난
같지만,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또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이 있다는 것을, 또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사랑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날 날이 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과 희망이 (슬픔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4,16)
여러분은 하느님을 잘 아시나요?
어떻게 아세요?
눈으로 뵌 적도 없는 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랑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누구신지
더 잘 알게 된다네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분을 알 길이 없답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면서도
사랑이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사랑을 통해서만
당신이 누구신지
쬐끔씩 알려주신답니다.
오늘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싶다면
더 사랑합시다.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우리 인생입니다.
오늘도
힘찬 사랑의 날개짓으로
하느님을 더 잘 깨닫는
기쁨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출처] 2015.07.29.|작성자 알타반
사랑고백 반영억사제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구지 낫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