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예언을 이루시려고 (마태 12,14-21)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맏아들을 치신 그 마지막 재앙 후에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난다. 장정만도 육십 만, 결국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해 내신 하느님을 기리며 파스카의 밤을 지샌다. (탈출12,37-42)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시작한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의 행적이 바리사이들의 가르침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당신의 활동을 계속하신다. (마태12,14-21)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마태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
이스라엘에게 이집트 탈출을 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잊는 것이었습니다(판관 2,10 참조). 그래서 탈출기는 열 번째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에게 대대로 파스카 축제를 지낼 것을 명합니다. 이날을 기념하여 주님을 위한 축제를 지내라고 거듭거듭 당부합니다(12,1-14.21-28 참조).
주님의 파스카가 지나간 과거의 일로 묻혀 버리지 않게 하려고, 또한 지금 우리가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있는 것도, 파라오의 종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이들로 살고 있는 것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 덕분임을 잊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의 삶이, 이스라엘을 구해 내시려고 밤새워 애쓰신 하느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이집트 탈출은 구약의 복음입니다! 놀라운 일이 되겠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면 하느님을 쉽게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섭섭한 일이나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일은 잊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호의는 쉽게 잊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도 합니다. 내가 체험한 나의 이집트 탈출을 어느새 잊은 것은 아닌지, 우리 구원을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미사 역시 습관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성서를 어떤 분들은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을 다스릴 사람을 당신의 모습을 닮도록 만드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였고, 그로인해 죄와 죽음이 생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의 결과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때로는 직접 사람들을 고통과 절망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인도하셨으며, 때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역사의 순간에 함께 한 사건이 모세를 통한 이집트의 탈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였습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틀을 벗어나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제물이 되셨고, 우리에게 성사를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표지인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표지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바로 하느님 백성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다른 의미로 ‘신비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다른 교회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한 몸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각 교회는 다른 교회를 위해서 도움을 주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몸이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고, 치료를 하듯이 신비체인 교회는 다른 교회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체인 교회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게 됩니다. 그로인해 가톨릭 사회교리가 생겼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연대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를 통해서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를 위해서, 도시빈민을 위해서, 장애인을 위해서 교회가 함께 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한 몸을 이룬다는 신비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파스카’라는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절망, 고통, 좌절, 슬픔에서 기쁨, 희망, 행복, 위로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파스카’는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는 파스카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편에 계셨습니까? 낮아지지 않는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없습니다.
조재형 신부
<부러진
갈대> 송영진 모세 신부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태 12,19)." '다투고 소리치다.' 라는 말에서 정치인들의 선거 유세가 연상되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활동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우고, 물질적인 수단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상대편을 힘으로 제압하는 등의 방법으로 세력을 확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사랑과 희생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대가를 주는 것도 아니고, 박해하기만 하고...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묵묵히 일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보기에 답답했는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이런 말을 합니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한 7,3-4)." 이
말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적극적으로 홍보 활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들은(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요한 7,5).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다른 율법학자들과 같은 랍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시기는커녕 사람들을 피하신 일이 여러 번 나옵니다. "...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마르 7,24)."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피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피하신 일이 아니라, 당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세속적인 이유로만 찾는 사람들을 피하신 일입니다. 들으라는
복음은 안 듣고 기적만 바라거나,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지상적이고
현세적인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라는 말은, 세속적인
방식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아볼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체성사에
관해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일이 좋은 예입니다(요한 6,66).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 정치적인
이유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아니면,
듣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사실
교회 쪽에서도 반성할 점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홍보 활동을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 교회의 겉모습만을 홍보하는 경우가 있고, 교세를
과시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고...(크고
멋있는 성당이 꼭 좋은 성당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는 "구원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쪽에서 스스로 구원받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라는 말은 전
인류가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는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즉
구원받을 가능성이 하나도 안 보이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가능성도 보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는
일이 마치
산을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는 일처럼 어려운 일로 생각되더라도(마태 17,20),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희망'이 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구원받는 일)에 대한 영적인
희망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살이에 대한 희망도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상에서의 인생 여정을 잘 마칠 수 있도록 힘과
도움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 (현세적인
복과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그런 희망은 아니고.)
모진
고난을 겪어도 신앙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인생살이가
너무 힘들면 기가 꺾여서 신앙을 잃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잘 들어가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살이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힘들어도
믿음과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또 기가 꺾이지 않도록...
인생이 너무 힘들다고 자살하는 경우,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자기가 먼저 포기하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희망을 버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살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점에서도 큰 죄가 되지만, 자기가 먼저 포기한다는 점에서도 '큰 죄'가 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마태 12,18)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올바르게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걸까요?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정확하지 않은 팩트 앞에
내가 옳니 니가 그르니 다투지 말고
특히 SNS를 통해
남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여
그 사람을 죽이지 말라시네요.
상처받고 단죄받고 무시당하는
사람을 짓밟지 말라네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를 위해 연민의 마음을 갖고
기도해 주라네요.
이미 부러진 갈대를
꺾지 말라네요.
오늘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조용히 침묵하며
그를 위해 기도해주면 어떨까요?
[출처] 2015.07.18.|작성자 알타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