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토요일>(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마태 10,24-33)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동굴에서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서방에서 처음으로 수도회 규칙서에 공동생활의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로 삼을 정도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베네딕토 아빠스는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야곱은 이집트 땅에서 숨을 거두지만, 조상들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펠라 동굴에 묻어 달라고 부탁한다. 요셉 또한 이집트에서 눈을 감으면서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갈 날을 내다보며, 자신의 유골을 그 땅으로 가져가라고 당부한다.(창세 49,29-31.33; 50,15-26ㄱ)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견하신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반대의 표적이 되어 거부당하고 죽임을 당하셨으니, 그 제자들이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육신이 죽임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영혼을 지켜 주신다. (마태 10,24-33)
창세기의 마지막 단락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독서 마지막 부분에서 생략된 창세 50,26의 말씀을 설명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요셉이 백열 살에 죽자, 사람들이 그의 몸을 방부 처리하고 관에 넣어 이집트에 모셨다.” 이렇게 하여 히브리말 원문에서 창세기의 마지막 단어는 “이집트에”가 됩니다.
아브라함에서 요셉에까지 이르는 성조들의 역사가 “이집트에”라는 말로 끝나는데,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모세가 요르단 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 땅을 바라보며 느보 산에서 눈을 감는 것과 비슷하게 오늘 오경의 마지막 부분도 그렇게 끝을 맺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은 이렇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그 약속이 분명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합니다. 자신의 시신을 막펠라 동굴로 가져가라는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의 유언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과 전폭적인 신뢰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표지가 바로 막펠라 동굴입니다. 아브라함이 히타이트 사람들에게서 샀던 이 한 조각 땅은, 성조들의 무덤으로 사용된 작은 땅에 불과하지만 그가 가나안에서 소유한 최초의 땅으로서 하느님의 약속을 보증하는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있다면 믿음의 여지는 없었겠지요. 하늘 나라가 완성될 때에도 믿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약속에 대한 희망을 말합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살았던 성조들의 신앙이었고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일 것입니다.
약속의 땅과 하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시련을 예고하십니다. 국가 권력을 쥔 통치자들은 물론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박해가 뒤따를 것이지만, “이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련과 박해를 겪어야 하는 고통스럽고 당혹한 상황에 직면하여 당황하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송영진 모세 신부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증언'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앞에 있는 18절-20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8-20)."
박해
상황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일을 도와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믿음과 의지와 노력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도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증언하려는 의지가 없거나, 증언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안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시는데도 도움을 안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고(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이
고백은 말로만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해야 하는 고백입니다. 항상
신앙인답게 살고 있어야 '신앙 고백'이 진실한 것이 됩니다. 또
이 고백은 '목숨을 걸고' 하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를 만났을 때에는 고백하지 못하고, 위험하지
않을 때에만 고백한다면, 그 고백은 거짓입니다.
위험한
상황에 빠져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에 사람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도
예수와 한패인가?" 라고 묻자, 그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태 26,69-75).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앙을 부인한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 예수님을
배반하기 위해서 사제들에게 갔을 때(마태 26,14),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먼저 밝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는
예수의 제자다. 그러니
당신들이 예수를 체포할 때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그의
경우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한 일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라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미 끊었다고 선언한 일입니다.
사실
유다의 배반이나 베드로 사도의 부인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배반죄'입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운명이 극과 극으로 갈라진 것은 회개를
했는가, 안 했는가? 의 차이 때문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긴 했지만 회개하지 않고 자살해버렸습니다. 만일에
그가 회개하고 돌아왔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의
자살은 배반죄보다 더 큰 죄, 즉 회개와 용서를 거부한 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회개했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과 생명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순교하기 직전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보았는데(사도 7,55),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그를
하늘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마중 나오신 일이고, 예수님께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신 일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들의
행동을 지켜보시다가 그대로 앙갚음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앙갚음하시는 분이라면 부활
후에 사도단을 해체하고 새로 사도들을 뽑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
하느님은 '잃은 양'이 하나도 없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좀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내가
그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까지도 거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모른다고 증언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예수님과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끊어지기 전에) '지금
빨리' 회개하여라." 라고
강하게 당부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안다."는 예수님의 증언을 거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는 그를 모른다."는 증언으로 바꿔버리는 일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모른다고 증언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와의 관계를 먼저 끊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이란, 사실은 하느님께서 하시기 전에 인간들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창세 50,20)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못한지라
가끔 실수도 하고 악도 저지릅니다.
고백성사도 보지만
어떤 죄악은
좀처럼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너무 괴로워하거나
아파하지는 마십시오.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악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악을 저지른 대상을 위해
하느님께 축복을 청해주시면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겁니다.
오늘
내가 악을 저지른 누군가가 기억나면
내가 저지른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시도록
그를 위해 주모경 한번 바쳐주세요.
[출처] 2015.07.11.|작성자 알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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