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 (마태7,21-29)
아직 이사악을 얻기 전, 아브람은 사라이의 여종 하가르를 통해서 아들을 얻는다. 아들을 낳은 하가르는 사라이를 업신여기다가 구박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가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어 그를 돌보시고 그에게도 후손을 약속해 주신다.(창세기16,1-12.15-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마태7,21-29)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마태7,21-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독서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이는 자기 여종인 하가르를 통하여 남편 아브람에게 아이를 낳아 주려고 합니다. 사라이의 태도는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내용과 흡사합니다. 그 법전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몸종을 남편의 소실로 줄 수 있었고 그 아이는 본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지략을 통하여 사라이는 자신의 불운한 처지와 난관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사라이의 계산과는 다른 방법으로 전개됩니다. 곧 사라이는 하가르가 낳은 자식으로 자신의 지위가 올라갈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하가르에게서 괴로움을 겪게 되고 이를 아브람에게 호소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길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절정은 불의를 당하던 사라이보다는 그것 때문에 구박받는 하가르에게 하느님께서 오히려 호의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하가르는 주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존재로서, 천사와 만나는 것은 곧 구원의 체험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천사와 만남은 일정한 장소나 시간에 매여 있지 않으며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이지요.
천사가 하가르에게 낳게 될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로 부르라고 지시한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가르가 고통 중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에는 하가르가 부르짖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가 소리가 되고, 하느님은 바로 그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사라이와 하가르의 상황은 묘하게 대조됩니다. 곧 사라이는 자기 힘을 믿고 괴로울 때 ‘내가 겪는 불의에 책임을 지라.’고 아브람에게 호소합니다. 반면 하가르는 하느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으나, 그 소리가 하느님께 들려 하느님께서 그 호소에 응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불의와 갈등, 고통의 진정한 해결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점을 독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 말씀도 놀랍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것이 아닌 셈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 마음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하느님의 뜻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 반영억신부
청주교구에 있는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은 1896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930년에 대성당을 지어 매괴성모님께 봉헌하였는데 7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터를 닦고 3년에 걸쳐 지었습니다. 1934년에는 석조 건물로 사제관을 지었습니다. 기초가 튼튼하고 관리를 잘하여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제관은 그야말로 반석위에 지어져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드러내 줍니다. 더군다나 대성당을 시작하기에 앞서 임 가밀로 신부님께서는 “성모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일 따름입니다.’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하시며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셨으니 지금도 여전히 그 믿음이 살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니 탈입니다. 입으로는‘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나는 종입니다. 그러나 종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나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의 탈을 쓰고 어찌 천국을 바라고 있는지 한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늘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이는 말합니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이다!”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종교인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행동에서 믿음을 봅니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혜와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제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동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종이호랑이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스승이 제자들에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말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교부 야고보).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행동의 원천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7,24)
하느님 말씀에서
기본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서는
건강한 믿음으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본은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올바른 마음일 것입니다.
마음의 기초공사가 절실히 필요한
우리시대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우리 내면을 파고듭니다.
우리의 삶을 잡아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모순적인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잘못된 기초를 바로 잡는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은
말만하지 않습니다.
실행하는 신앙만이
반석 위에 지은 신앙이 됩니다.
기본 중에 기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의 내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이분이 기본이며
기초이며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남북통일 기원 미사>(2015. 6. 25. 목)(마태
18,19ㄴ-22)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을 주어야 한다.>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이
말씀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은 '공동체 전체'를 뜻합니다. (공동체
가운데 두 사람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을
모아'는 공동체의 일치와 사랑을 뜻합니다. '무엇이든'은
'아버지의 뜻에 맞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입니다. 글자
그대로 아무거나 막 청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만 청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라는 말은 '하늘에' 라는 말과 연결되는데, 이
땅에서 인간들이 바라는 것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청하면'은
'이루어 주실 것이다.'에 연결되는데,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하면 되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하느님께 청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무엇이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남북통일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일치와 사랑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북통일은 우리가 모두 마음을 모아야 하는 일입니다.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어떤
사람은 평화보다는 전쟁을 원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보다는 미움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통일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말로만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이고, '빈 말'입니다.
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늘만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남북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이
말씀은 앞의 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라는 말도 '공동체 전체'를 뜻합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신앙인 공동체를 뜻하기도 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예수님의 뜻에 맞는 것을 청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부터 실천하면서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가르침 가운데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이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는 것과 같고,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의 청을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도 함께 있다." 라는 말씀은 우리 쪽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니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사랑을 말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일치'와
'사랑'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 바로 '용서'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용서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남북 갈등도 문제이지만 남남 갈등도 큰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와 이념과 신념이 다른 사람을, 또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있으니, 마음을
모아서 아버지께 청하는 일이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신념만 내세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꼭 상대방 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먼저 미운 짓을 했다. 그쪽에서 먼저 분열을 조장했다. 내가
용서하려고 해도 그쪽에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더
심하게, "왜 그런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가? 전체를
위해서 그런 사람은 제거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라는 말씀은 "용서란
무조건이고, 무제한이다." 라는 뜻입니다. 원인을
따지지 않고, 책임을 묻지 않고, 조건을 달지 않고, '그냥'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쪽이
먼저 사과해야 하고, 배상해야 하고, 죗값을 치러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용서할 마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념
문제나 통일 문제에 관해서 사랑보다는
증오심을 먼저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대부분 상대방이 미워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할
대상이 있어야 자기존재가 드러나니까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을
하고 싶은데, 적이 없다면 전쟁을 할 수 없으니까 일부러
적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증오심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일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쫓아다녔던 이야기를 보면, 쫓겨 다닌 다윗보다 쫓아다닌 사울 쪽이 더 평화를 잃은 모습입니다. 미움 받은 다윗보다 미워하는 사울이 더 불행했다는 것입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에페 4,29)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25 동존상잔의 비극이 시작된지
어언 65년이나 되었네요.
그 비극이 가져다 준 분단의 아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네요.
그놈의 이념이 뭐길래 좌익우익으로 갈라져
서로 치고박고 싸운 결과가
이토록 오랫동안 큰 아픔을 주고 있으니
기가 막히지 않나요?
지금도 진보니 보수니
이념논쟁을 하고
종북이니 친미니 하고 있으니
그 영령들이 기막혀하지 않을까요?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이념논쟁을 당장 그만두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나쁘다, 틀렸다, 우리편이 아니다 하지 말고
서로에게 배울려는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요?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 입에서 다른 이에 대해
나쁜 말이 나오지 않게 된답니다.
[출처] 2015.06.25.|작성자 알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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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오 복음 7장 21-29절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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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당연한 사실에다 물음표를 던지니 당황스럽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귀가 있어서 듣습니다. 악성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음에도 위대한 소리로 어우러진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그런데 귀로만 듣는다고 믿는 사람은 이 세상 소리를 다 듣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그 귀를 잃어버리면 자기 안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귀는 듣기 위해 있는 것이 맞지만 귀로만 듣는 것이 온전히 듣는 것이 아닙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듣고자 함은, 그리고 보고자 함은 궁극적으로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궁금해서 듣고, 보고, 말하고, 느낍니다. 듣고 실행하는 이란 바로 내 인생을 진심으로궁금해하는 사람이며, 그에게 아픔이나 시련은 인생을 흔드는 바람일 수 있지만, 삶의 기반을 뒤집는 위험은 아닙니다. 지금 내 삶이 고민스럽다면 나는 듣고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 김태홍 신부(서울대교구 수유동성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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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삶을 온 존재로 듣고, 보고, 느끼는 하루 되기실 빕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