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화요일>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 5,43-48)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 열성을 보였음을 매우 칭찬하면서 이 사실을 코린토 신자들에게 전한다. 그들은 구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우리를 부유하게 하셨다고 말한다.(코린토 2서 8,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바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이들이 지녀야 할 태도이다.( 마태 5,43-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난해 여름 수도 생활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날마다 여러 주제로 조별 나눔을 했습니다. 하루는 정결 서원에 대하여 나누다가, 공동체 생활이 힘들지 독신이 뭐가 어렵냐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물론 수도 생활보다 결혼 생활이 더 쉬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사람이 마음을 모아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해 크게 잘못된 기대를 지니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마음으로 바랐던 공동체는 사랑만이 흘러 넘쳐서 평화롭고 행복하며, 누가 보아도 저 안에서 꼭 살고 싶다고 느껴지는 그러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살려고 하는 그러한 공동체라면 결과적으로 그 공동체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이들끼리만 모여 사랑”하는 친목 단체에 불과할 것입니다. 불화나 어려움이 하나도 없을 테니, 그런 공동체라면 세리들이나 다른 민족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모두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사랑하기 쉽지 않은 이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 일할 때에는 나를 도와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매일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신세를 지면서도 나를 피곤하게 하는 그러한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더욱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는지요? 원수마저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사랑의 새 계명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며,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글자 그대로 오늘 복음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이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이
말씀은, "자기를 좋아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또
자기 형제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이들'입니다.
여기서
'세리들'은 죄인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를 좋아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 사실상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이것은
범죄 조직의 조직원들이 함께 죄를 지으면서 자기들끼리
의리를 지키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리도 죄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은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사랑할 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는 사랑 받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무슨 상을 받겠느냐?" 라는 말씀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정도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상'이라는 말을 '사랑'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라는 말씀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느냐?"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무조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마태 5,45). 우리가 죄 속에서 살고 있어도, 하느님에게서 떠나 있어도,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랑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못 받게 된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안 주셔서 못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시는 사랑을 우리 쪽에서 안 받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제대로 받는 일이 됩니다.
'자기 형제들'은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을 가리킵니다. '남'과 '다른 민족 사람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자기 편만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도 아니고, 신앙인의 사랑 실천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집단 이기주의일 뿐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이 말씀을 46절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원수'는 내가 좋아하지 않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네가 싫어하고 너를 싫어하는 사람도, 네가 미워하고 너를 미워하는 사람도, 잘 아는 사람도 잘 모르는 사람도 모두 사랑하여라."가 됩니다.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경우에는? 무관심 자체가 사랑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무관심'을 버려야 합니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입니다.
'박해하는 자들'은 '내 편이 아닌 사람들', 즉 종교와 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여라."가 됩니다. 실제로 박해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종교와 신앙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이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제외하고, 싫어하는 사람도 제외하고, 좋아하는 사람, 친한 사람, 잘 아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무조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그래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고 우리가 노력한다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계명으로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원수를(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작은 씨 하나를 심으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큰 나무로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마태 13,31-32).
싫다고(밉다고) 처음부터 사랑하기를 거부해 버리면, 즉 씨를 심는 일 자체를 포기해 버리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까지 막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 5,46)
여러분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친지와 친구를 사랑하고
나에게 잘 해 주는 이를 당연히 사랑하겠지요?
그런데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지요?
적어도 내 맘에 영 안드는 사람이 있지요.
주는 것 없이 밉상인 사람이 있지요.
나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손해를 끼쳤거나 무시를 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런 사람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네요.
어째 그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빛을 비추어주시는 하느님에게서 배우라시네요.
사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지요.
내 자식이 아무리 내 맘에 안들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부모맘이지요.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 자녀라 여기시기에
그게 가능하지요.
따라서 우리도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이고
그래서 남이 아니라
다 나의 형제자매라고 생각한다면
더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내 맘에 들던 안 들던
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고
나의 형제자매들이라고 여기며 바라봅시다.
모두 예뻐보이고
사랑스러울 겁니다. 아멘.
[출처] 2015.06.16.|작성자 알타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삶 속에서
고통을 떼어 낼 수 없듯이 고통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성찰하게 합니다. 절박하면할수록 하느님께 집중되는 우리의 고통입니다. 고통과 함께하기에 사랑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선물이 됩니다. 고통없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길은 갈 수 없는 길이 아니라 주님처럼 가야만 하는 우리의 길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생명은 고통을 통해 우리존재를 제대로 알게됩니다. 사랑앞에선
모두 죄인이며 원수인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기도는 사랑의 관계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주님의 고통임을 알기에 십자가에서 비로소 용서를 배우며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는 사랑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과 고통은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신비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