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금요일]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마르 12,35-37)

2015. 6. 5. 오전 6:3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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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9주간 금요일]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마르 12,35-37)

2014년 6월 5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보니파시오 성인은 675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회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성인은 특히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인츠의 교구장이 된 보니파시오 주교는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웠다. 성인은 선교 활동에 주력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토비야는 사라와 결혼하고 토빗이 맡긴 돈을 찾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아들을 기다리던 안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다고 말하며 기뻐한다. 라파엘의 지시대로 물고기 쓸개를 토빗의 눈에 바르자 그는 시력을 되찾고 하느님을 찬미한다.(토빗 11,5-17)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시편을 인용하시며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당신께서 다윗보다 더 높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뜻한다.((마르 12,35-37)

 

시편 146(145),1ㄴ-2.6ㄷ-7.8-9ㄱ.9ㄴㄷ-10ㄱㄴ(◎ 1ㄴ)
◎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사는 동안, 나의 하느님 찬송하리라. ◎
○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
○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
○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마르 12,35-37)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대천사 라파엘과 토비아

 

수능 시험에서 정답이 여러 개 나온다면 전국적으로 큰 난리가 납니다. 그러나 성경 해석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에 오늘 복음과 병행되는 단락이 있습니다(22,41-46). 친구가 그 본문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본문 해석에서 지도 교수와 의견이 충돌했습니다. 친구는 메시아가 그래도 다윗의 후손이 옳다고 주장했고, 지도 교수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강조했습니다. 끝까지 합의점에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논문을 지도하신 분이, “우리 둘이 꼭 의견이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끝을 맺으시며 논문을 통과시켜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은 당시에 교황청 성서위원회 총무 신부님이셨습니다.
친구는 그 신부님의 인품을 존경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태도는 그렇게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한 인간의 지혜로 무한하신 하느님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다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성경 강의를 하면서 제가 자주 인용하는 한 단락을 옮겨 보겠습니다.
“바른 지향과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인간 지성의 한계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잘못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알아듣고자 기울이는 모든 노력 자체는 정당하다고 믿는다.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아 가고자 하는 인간은, 육이 되시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 하느님께 응답하면서 바로 그 길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독서에서는 온갖 시련과 불행을 잘 이겨 내고 다시 보게 된 토빗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가 이 기도를 바치기까지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번뇌하였을까요? 절망 상태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며 지낸 그의 인고의 세월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말 못할 억울한 일과 설명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힘겹고 벅찬 일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주처럼 여겨지는 그 고통을 신앙 안에서 덤덤하게 수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주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야말로 참신앙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오늘 아주 많은 분이 토빗처럼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메시아의 나라>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5-37)

예수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메시아의 나라'는 다윗 왕조가 복원되어서 그 후손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입니다.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말은, 그가 예언하고 희망한 '메시아의 나라'는 자기의 왕권이 보존되고 계승되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예언하고 희망한 '메시아의 나라'는 인간의 왕국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만일에 율법 학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다윗의 자손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나와서 다윗 왕국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 나라는 다윗 왕실과 지배 계급 사람들에게만 좋은 나라가 될 뿐입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게 좋은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로마제국이 다스리든지 헤로데 가문이 다스리든지 다윗 왕실이 다스리든지 간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메시아 시대', 또는 '메시아의 나라' 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수님은 정말로 다윗의 자손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다윗 가문의 족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의 족보가 아니라 요셉의 족보이고, 요셉의 족보에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갔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메시아' 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진짜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라는 말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라고 번역을 바꿔야 하는데, 어떻든 이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시의 일반 백성들이 메시아를 갈망하긴 했지만, 속마음으로는 다윗 왕조가 회복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음을, 또 그들이 희망하는 '메시아의 나라'는 다윗 왕국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지배자나 지배 계급 같은 것은 없는 나라, 모든 압박과 억압에서 해방되는 나라를 희망했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 시대를 보면, 끊임없이 전쟁을 했던 시대였고, 백성들은 전쟁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시대였습니다. 그 뒤에 솔로몬 시대를 보면, 수많은 토목 건설 사업을 했던 시대였고, 그래서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동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시대였습니다. 백성들이 그런 나라를 희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의 나라'는 다윗 왕국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실 때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 '메시아의 나라'는 가난한 이, 잡혀간 이, 억압받는 이가 없는 나라, 모두가 해방되고,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기뻐하는 나라입니다. 왕과 지배 계급 사람들만 행복하게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묵시록에서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왕이 필요 없습니다. 지배 계급 같은 것도 없습니다. 모든 시민이 하느님의 왕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전부 다 왕이 되고 지배자가 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메시아의 나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또 교회가, 또는 교회의 지도자가 다스리는 나라도 아닙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하느님 나라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교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없으니 교회의 지도자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지배자들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마르 10,43).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메시아의 나라)가 그런 나라라고 해서 지금의 인간 세상의 모든 제도와 모든 통치가 다 악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통치자도 있고, 악한 통치자도 있습니다. 선한 제도도 있고, 악한 제도도 있습니다. 어떻든 그런 것들은 모두 종말이 오기 전까지의 임시 제도일 뿐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예수님(하느님)만을 진정한, 또 유일한 지배자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세속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세속의 법과 제도를 따르긴 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예수님(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완성되고, 예수님(하느님)의 통치권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선배 신부님 중에 보니파시오세례명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인 1989에 보좌신부님으로 계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게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매일 새벽에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새벽 5시면 성당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신학생인 저는 방학이면 새벽미사를 갔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가장 먼서 성당에 나오셨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늘 책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친교를 중요하게 여기고, 술을 가까이 하던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새로운 책을 읽으시고, 독서카드를 작성하시던 신부님께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폭이 깊고 넓어지셨습니다. 세 번째는 운동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듯이, 신부님께서는 매일 꾸준히 운동을 하셨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었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가끔 교구의 모임에서 신부님을 뵐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말은 하지 않지만 신부님의 모습에서는 깊은 내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지금도 새벽 4시면 성당 문을 손수 여시고, 기도를 하신다고 합니다. 여전히 책도 열심히 읽으시고,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신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기도, 독서, 운동으로 자신만의 영적인 토대를 만들어 오시는 신부님께 존경을 드립니다. 그런 신부님께서 같은 교구에 계시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토빗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지만 눈이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토빗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토빗을 보시고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헤어졌던 아들을 다시 만났고, 며느리도 얻었으며 잃어버렸던 시력도 되찾았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중에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열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꽃이 피어나서 좋은 것은 보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태어나서 좋은 것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윗도, 구약의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고정 관념을 깨뜨려야 반영억 신부

우리는 자기의 고유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다른 것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만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문을 열어 놓아야 더 풍요로워집니다. 특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유식한 무지를 속히 버려야 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고 하느님과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서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다윗 가문의 출신으로만 국한시켜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사명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놓을 때까지.(마르12,36)하고 말하였는데 첫 번의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내 주님께는 다윗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주님은 예수님시대의 율법학자뿐 아니라 유다교의 각 종파에서는 모두 메시아, 곧 왕으로 오실 다윗의 후손으로 이해하였습니다.(2사무7,12-16. 22,51; 호세3,5; 예레30,9)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다윗의 메시아인 예수님께 당신의 오른쪽에 앉게 하여 모든 권능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게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하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는 메시아는 위대한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자손 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핏줄과 족보에 따른 메시아, 다윗의 왕정이념에 따른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를 뛰어넘어선 권위 있는 메시아이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갈망하던 잘 먹고 잘사는 평화로운 세상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는 마침내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학자들이 망신을 당해서? 아니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시고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끌려서? 아니면 미래에 대한 새 비전을 갖게 되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바람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원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 하느님에 대한 상을 살펴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나보다 먼저 태어났느냐 나중에 태어났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깨달음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참된 깨달음 안에는 나이의 앞뒤가 없습니다. 인생은 살아온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느냐로 기억됩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토빗 11,14)

우리가 기도할 때나 성가를 부를 때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토빗의 기도처럼 자주 바치지요.

이런 찬미의 기도가
입으로만이 아니라 나의 체험에서 비롯된다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겠지요.

정말 수많은 고통과 인내 가운데서
결국 하느님께서는 나를 저버리지 않으셨구나...
이렇게 고마울 때가...
아, 주님!
오, 나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여러분은
언제 그런 체험을 하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누구에게나
작든 크든 그런 체험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자, 오늘도
정말 체험에서 비롯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는 날 되소서.

나에게 일어나는 작은 기적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바라보는 오늘 되소서
.

[출처] 2015.06.05.|작성자 알타반

어느 노인의 기도 감동을 주는 노인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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