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7주간 화요일>(2015. 5. 19. 화)(요한 17,1-11ㄴ)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만난다. 그는 에페소 신자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이제 바오로 사도에게는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되고 그곳에서 순교를 맞이해야 할 마지막 여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사도20,17-27)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남김없이 이행하심으로써 땅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을 떠나가시면서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요한 17,1-11ㄴ)
시편 68(67),10-11.20-21(◎ 33ㄱㄴ)
◎ 세상의 나라들아,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하느님, 당신은 넉넉한 비를 뿌리시어, 메말랐던 상속의 땅을 일구셨나이다. 당신 백성이 그곳에 살고 있나이다. 하느님, 당신은 가련한 이를 위하여 은혜로이 마련하셨나이다. ◎
○ 주님은 날마다 찬미받으소서. 우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 구원이시다.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 주 하느님께 있네. ◎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1-11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1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5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6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9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11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묵상]
바오로 사도의 밀레토스 설교를 묵상하다 보면 늘 부러움을 느낍니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내어 주었기에 아쉬울 것도 후회할 것도 없는 삶, 이것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이 설교에서 바오로 사도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께 받은 직무”인데 그 내용은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삶의 의미였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이것에 자신의 삶을 후회 없이, 남김없이 다 바쳐 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목숨을 아까워해야 할 이유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살면서 겪은 시련과 눈물, 그리고 앞으로 닥칠 투옥과 환난과 죽음마저도 그 직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할 일을,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완수했으니 하느님 앞에 가서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1코린 9,16)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당연한 직무라고 밝혀 왔기 때문입니다. ‘직무’는 그 일을 해서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듯이, 바오로도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은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라는 직무는 바오로에게 덧붙여지거나 부과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기도’가 봉독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종결하는 최대의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그분에게 일생의 영광이었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분께 순종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오신 예수님께서 그분께 되돌아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영광에 이르는 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직무는 서로 다릅니다. 평생 이루어야 할 사명도 있고, 오늘 만나야 할 사람도 있으며, 지금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에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 바오로 사도처럼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에 기쁜 마음으로 길을 나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오늘 하루에도 우리는 수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겠지요. 그때마다 “이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자문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생명> 송영진 모세 신부
요한복음 17장은 최후의 만찬 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신 기도인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라는 점에서 '주님의 기도' 라고 부를 수 있고, 또 제자들 들으라고 바치신 기도일 수 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17,2)."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심판하는 권한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생살여탈권'입니다.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7-48)."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구원과 생명을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심판은(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수동적으로 당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는 구원과 멸망 가운데에서 하나를 우리 자신이 선택하는 일이 되는데, 그 선택은 그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구원을 선택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멸망을 선택한 사람은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는 일은 아니고, 구원을 선택했다면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끝까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또 멸망을 선택했더라도 늦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서면 됩니다.
지금 이 내용은 인생관(가치관)에 직결됩니다. 인생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크게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해도 그 성공이 그저 세속적인 성공일 뿐이라면, 또 영원한 생명을 안 믿고,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의 인생은 허무할 뿐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기억해 준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 줌의 먼지로 흩어져 버리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느님(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 하느님(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고, 그래서 하느님(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란'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 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유일한, 진짜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신은 모두 가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는 신은 모두 가짜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지금 여기서 사용된 '안다.'의 반대말은 '모른다.'이고, 모른다는 말은 관계를 부정하는 말이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바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하였다(마태 26,72)." 베드로의 말은, 자기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뜻인데, 예수님과의 관계와 일치를 모두 끊어버리는 말이 됩니다. 비록 겁에 질려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지만,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부한 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앙갚음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먼저 관계를 끊으시지는 않겠다는 것이 진짜 뜻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관계를 끊으시기 전에 자기 쪽에서 먼저 스스로 관계를 끊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다가 금방 회개한 그 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큰 위안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교훈이 되고, 그러면서도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졌더라도 회개만 한다면 다시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위안이 되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어라 반영억 신부
많은 분들이 성체조배나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자비의 기도, 십자가의 길 등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가끔 “9일기도를 하면 소망을 꼭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기도 하고 기도하는 만큼 주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나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기도문만 외운다고 그렇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횟수나 형식에 매이지 말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대로 삶의 쇄신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에 앞서 당신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과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함에 있어서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기본핵심은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믿게 되는 이들, 바로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완성하길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기에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과(요한6,32이하) 생명의 물(요한4,10이하)을 주시며 풍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요, 안다는 것은 결국 통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온전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면서 사랑의 친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업시간에는 일로써, 기도시간에는 기도로써 우리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를 말, 생각, 장소, 시간에 국한시키지 말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 언제 어디서든지 현존하시는 주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부디 삶이 기도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행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