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목요일]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11)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가 열린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일, 곧 그가 환시를 보고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준 일을 환기시킨다. 야고보 사도도 구약을 근거로 하여 이방인들을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면서 최소한의 규정만을 요구할 것을 권고한다. (사도행전 15,7-21)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당신이 머무시는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과 평화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요한 15,9-11)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할례 문제에 관한 토론이 이어지는데, 오늘 독서는 “오랜 논란”이 있었다고 짤막하게 전합니다. 하지만 이 단락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발언을 전혀 전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그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요. 사도행전 저자는 바오로가 어떤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그들을 이해시켰는가보다는 베드로가 어떻게 그를 지지해 주었으며 야고보가 어떻게 그 논쟁을 마무리 지었는가를 전해 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처음에 이방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고 말씀하신 뒤에야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때에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을 부르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경 말씀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확인하고 증언합니다. 다른 민족들이 주님을 찾게 되는 일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미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할례 받은 이들과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이 함께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게 되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교회의 일치를 도모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야고보는 유다인들에게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 것을 간청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유다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최소한의 규정을 지켜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먼저 함께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성령의 이끄심에 맡겼습니다. 성령께 귀를 기울이고 성경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내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을 이루시도록 길을 내어 드리고 그 길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하느님 귀에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장소가 되고 그 성령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소유하려면 언제나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기쁨이 고통과 시련을 거슬러 험하고 끈질긴 투쟁으로 얻을 수 있는 열매이기도 하듯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노력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거나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기쁨, 슬픔> 송영진 모세 신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내가 너희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너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이다."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궁극적인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을 때 누리게 되는 그 기쁨입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는, "내가 너희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께 우리의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계명을 지키는 것'과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 같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율법이나 교회법이나 십계명이나 규칙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또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신다는 말은, 무슨 규칙 같은 것을 지키신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을 예수님도 바라시고, 그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서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우리도 바라는 것, 그래서 그것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얻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얻게 되실까? 예수님께서 얻는 것은 '기쁨'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이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예수님의 행복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사랑을 받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보는 기쁨과 행복, 그것이 사랑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더 고상하고 더 멋있는 말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너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고,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다."
하느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해서 구원을 받게 되면 크게 기뻐하시는 분입니다(마태 18,13). 만일에 인류 전체가 회개해서 모두 구원을 받게 되면 하느님의 기쁨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전부 다 그 기쁨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은 예수님께도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가장 먼저 우리 자신에게 기쁜 일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기쁨과 예수님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은 하나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일이고, 동시에 하느님과 예수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우리의 기쁨이 완전히 일치되고 완성될 때, 그때가 바로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이 아닌, 다른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기쁨이라고 착각한다면?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는(하느님께서도) 크게 슬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모습이 바로 그 슬픔을 잘 나타냅니다(루카 19,41).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때마다 거의 항상 슬퍼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슬픔을 전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인류의 모습이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은 외면하고, 갈수록 속된 쾌락을 즐기는 쪽으로 가는 모습이기 때문에, 또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길보다는 점점 더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도 예수님도 성모님도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이고, 반대로 슬픔을 드리는 것이 가장 큰 불효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고, 슬픔만 드리는 사람은 아주 잘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는(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님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슬픔만 드리고 있는가?

교회에는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봉사하는 분들은 무슨 보수를 받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봉사하는 마음에는 자신들의 봉사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누군가 나의 봉사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봉사에 점수를 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봉사를 하면 ‘사인’을 받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야 봉사 점수에 기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보속’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면 좋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보속을 한다는 것은 드러날 경우 나의 허물과 나의 잘못이 알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봉사하려고 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게 됩니다.
이 봄에 많은 생명에게 활기를 주는 물은 자신이 한 일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빛을 주는 태양도 짜증을 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밝은 빛을 우리에게 줄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나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을 때면, 말은 하지 않아도 속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는 몇 가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점차 늘어나는 이방인 공동체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방인 공동체는 유대인 공동체와는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어가 달랐고, 음식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사고와 철학도 달랐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방인 공동체들도 유대인들의 문화와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초기에 박해의 단초가 되었던 ‘제사논쟁’도 비슷한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첫 번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명확하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인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토착화’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전해지는 지역의 풍토와 전통에 맞게 토착화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선배 사제들은 이런 말씀을 하곤 하셨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먼저 6개월 동안 그곳의 전례와 그곳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문제점이 있다면 천천히 고쳐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전임자들이 하였던 일들은 한꺼번에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 성급하게 자신의 뜻대로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남들에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
여러분은 기쁘게 살고 싶으시죠?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지요?
어떻게 하면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시며
그 방법까지 알으켜 주시네요.
한마디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 하시네요.
사실 우리가
기쁨 가운데 머물렀던 때를 돌아보면 늘 사랑 안에 있었을 때였지요.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면
우리는 마냥 행복하고 기쁩니다.
오늘 내가 사랑 안에 머물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가 사랑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살펴 봅시다.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니까요.
사랑 안에 머무는 여러분이 아름답습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여러분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참으로 기쁨으로 충만한 오늘 만드소서~~^^
오상선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