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일 노동자의 주보 성 요셉 축일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이다. 목수로 일한 성인은 오늘날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받고 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19 참조). 그는 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아기 예수와 그 어머니 마리아를 보호하려고 멀리 이집트까지 피해 갔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셉 성인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공경하고 있다.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이하여, 하느님께서 첫 인간 부부에게 땅을 맡기시는 말씀을 묵상한다. 사람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땅을 지키고 온갖 생물을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창세기 1,26―2,3).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 부른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들은 나자렛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노동자의 아들이셨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면서도 그분을 믿기는커녕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다( (마태오 13,54-58).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마태오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이신 예수님> 송영진 모세 신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양아버지로 가난한 노동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요셉 성인이 가난한 노동자(목수)였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년 시절을 모르지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요셉 성인을 따라다니셨을 것이고, 목수 일을 도와드리면서 배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소년 예수님을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과 좋은 나무를 고르는 요령과 여러 가지 생활 용품들을 만드는 기술 등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요셉 성인이 예수님께 성경이나 율법을 가르쳤을 것 같지는 않고, 목수로 살면서 얻은 여러 가지 지혜와 지식과 경험을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 자신도 목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6,3).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사시면서, 또 당신 자신이 직접 가난한 노동자로 사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 선포를 준비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또 신앙인들은 부유한 자본가들이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고, 그들 편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어떻든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시작된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인데, 그 출발점에서 요셉 성인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이 혈통으로는 다윗 왕의 후손이지만, 직업은 목수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인데도 인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노동을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실제로는 노동은 고귀한 직업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가 부자들을 역차별하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을 비롯해서 기득권층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그런데 지금 교회의 모습을 보면, 교회 자신이 또 하나의 기득권층이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별로 가난하게 보이지 않는 대부분의 성직자들 모습이 그렇고, 교회의 전체적인 모습도 그렇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취미 활동들, 돈이 많이 드는 그런 일들을 성직자들이 즐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을 비판하면 듣기 싫어하고, "너나 잘해라." 라는 반응을 보이고...그러면서도 노동자이신 예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
교회가 너무 부유해졌다는 말을 들은 것은 오래 전부터입니다. 그 재산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유지하고, 사용하는지... 그 모습 자체가 기득권층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부유해지면, 가난한 사람들은 정말로 갈 곳이 없습니다. 사실 교회의 재산에는, 또 성직자들이 사적으로 쓰는 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낸 헌금도 들어 있습니다.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서 "노동은 신성하다.", 또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같은 상투적인 강론을 하기 전에 먼저 성직자들부터 정말로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 사회의 경제 활동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성실하게 일하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하다가 그게 지나쳐서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가난할 때에는 하느님만 잘 섬겼는데, 가난에서 벗어나서 부자가 된 다음에는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내려 주실 때,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내었음을 기억하여라. ... (신명 5,12-15)"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너도 한때 종살이를 하였음을 기억하고, 종들과 이방인들도 쉬게 해 주어라.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정신이다."입니다. 이 말씀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하느님 말씀은, "(그들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억압과 차별과 착취를 당하지 않기를, 그래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당신의 자녀로서 생활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지금 이 땅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임금도 못 받고, 날마다 중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이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높이 수학’이라는 학습지가 있습니다. 수학이라는 학문은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과목입니다. 저도 수학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눈높이 수학은 학생의 수준을 파악하고, 학생의 입장에서 어려운 수학을 가르친다는 뜻일 것입니다. 도형의 넓이를 계산하고, 방정식을 풀고, 함수까지는 이해 할 것 같았는데 통계, 미분, 적분과 같은 분야는 잘 이해 못하였습니다. 만일 제가 눈높이에 맞는 강의를 들었다면 좀 더 쉽게 이해했을 것 같습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도 그렇습니다. 특히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그 나라의 문화, 역사, 전통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제품은 좋지만 현지에서 실패하는 경우는 그 나라의 특성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지인들이 선호하는 색상, 디자인, 생활습관을 충분히 파악한다면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을 것입니다.
본당사목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본당에 부임하면 적어도 6개월은 지켜보라고 합니다. 본당 신자들의 분위기를 보고, 지역의 현안도 파악하면 새로운 사목의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부임하면서 바로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려고 하면 신자들도 어려워하고, 그런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입니다. 밥은 ‘뜸’이 들어야 제 맛이 나듯이 사목도 신자들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야 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방법도 어쩌면 ‘눈높이 선교’인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의 역사를 풀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들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들으니, 쉽게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에게는 그리스의 철학과 역사를 풀어서 참된 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또한 ‘눈높이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로 오셨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이 그렇습니다.
5월의 첫날입니다. 5월에는 많은 기념일들이 있습니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5월에 우리들 또한 ‘눈높이 사랑, 눈높이 선교’를 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교황 비오 12세
1955년 비오12세에 의해 5월 1일을 노동절로 제정되었다. 노동과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과 관련하여 깊은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고, 하느님을 창조주로 인식하고 공경하도록 사명을 받았다.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역량의 한계 내에서 어떤 의미로는 창조주의 활동을 계속 발전시키고 우주만물 전체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와 자원을 발견하여 이를 더욱 더 진보시키고 그 창조활동을 완성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창세기 1장에 펼쳐지는 하느님 창조사업의 대 파노라마에서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휴식하셨음도 노동의 신성성을 교훈하고 있다.
묵시록에서도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라고 선포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서 이룩하시는 노동의 품위를 고양시켜주고 있다. 또한 창조의 하루하루마다 노동의 끝마감 때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심은 하루의 수고를 마친 노동자의 흡족한 심정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 창조사화는 최초의 “노동의 복음”이라 칭할만하다.
즉 인간만이 홀로 하느님을 닮았고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자신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닮아야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실제 행동으로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군중들이 자타가 공인하는 목수로서 장인으로서 직업노동자였다.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그분 자신이 노동하는 세상에 속해 게시면서 인간의 노동을 이해하고 존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사도직을 추수하는 사람들이나 어부들의 육체노동에 비유하신다. 나자렛 시절 당신의 삶으로써 모범을 보이셨던 그리스도의 노동에 관한 이 가르침은 특히 사도바오로의 가르침에서 생생하게 반향하고 있다. 바오로사도는 자신이 천막 만드는 직업을 자랑으로 여겼고, 사도이면서도 자기가 먹을 것을 벌 수 있게 한 그 노동에 감사하였다.
“우리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하며 애써 노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권고와 명령의 형식으로 노동에 관한 가르침을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권고합니다. 말없이 일해서 제 힘으로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실제로 “게으른 생활을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의 일에만 참견하는 사람들”을 보고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십시오.”라고 책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인간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노동과 활동을 통해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자신을 완성시켜나간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자기 능력을 기르며 자기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외적재산의 축적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한편 인간의 노동에는 또 다른 국면이 있다. 그것은 모든 노동에는 불가피하게 노고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노동에 관한 원초적인 축복은 바로 창조의 신비 안에 들어있고 이 축복은 죄악이 가져온 저주와 대조를 이룬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고. 노동과 관련된 이 고생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와 연결되면서 신비의 차원으로 고양된다.
즉 인류의 삶의 현장에서 노동에 수반되는 땀과 노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참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다.
십자가 뒤에 부활의 기쁨이 있듯이, 노동의 노고와 땀흘림 뒤에 새로운 생명의 서광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노동은 사회를 건설하고 세상에 유익을 줄 때에만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력하는 것이요, 따라서 의미를 지닌다.
파괴적이고 반생명적인 죽음의 문화에 기여하는 노동은 하느님이 태초에 에덴동산을 돌보라고 맡겨주신 노동의신성성에 반하는 것이요,
마지막 날에 하느님은 그들에게 “내가 언제 너에게 에덴동산을 파괴하라고 맡겼더냐?”고 문책하실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생명의 복음”회칙에 따라 모든 노동자들이 죽음의 문화가 아니라 생명의 문화에 종사하고 노동의 수고에 대한 정당한 보수가 지급되고 노동자간에도 하느님 창조사업에 함께 협력하는 연대의식을 자각하도록 기도해주자.

[오늘의 묵상]
노동자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분들은 많습니다. 요셉이 목수였다면
베드로는 어부였고 바오로는 천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 성인 가운데 특별히 요셉을 노동자의 수호성인으로 정했을까요?
요셉
성인과 다른 모든 성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양아버지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성무일도 아침 기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은, “목수로서 충실히 일하신 성 요셉은 노동자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다.”고 그를 칭송합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을 비롯한 여러 교황의 수많은 근현대 회칙들은, 요셉의 모범을 본받아 노동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과된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순결한 배필이며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양부이지만,
요셉은 그 당시 아주 흔한 직업을 가지고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성가정의 울타리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문맥상 존경이 담긴 표현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목수의 아들’, 노동자이신 그분에게서 지혜와
기적의 힘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의아하게 여겼고, 더욱이 목수의 아들이 예언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인물로 알려진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기적의 힘’을 지닌 분이셨고, 스스로 당신 자신을 ‘예언자’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러나 ‘목수의 아들’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은 그저 여러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귀족이나 사두가이나 율법 학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자인 목수의 아드님을 통해서 당신의 ‘지혜와 기적의 힘’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하심은 놀랍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마태 13,55)
여러분은 누구의 아들이고 딸입니까?
저는 '몰락한 지주의 손자요 일찍 작고한 교육자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었냐를 아직도 우리 정체성의 일부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의 직업가치 기준에 따라 부모 직업의 귀천을 따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직업을 어떻게 여기시나요?
그 직업을 자랑스러워 하나요?
아니면 부끄러워 하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내 부모의 직업이 챙피하다고 여긴다면
예수의 직업을 한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는 목수였고
그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직업을
대를 이어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을 자랑스러워 했을 겁니다.
오늘 나의 직업에 대해 자랑스러워 합시다.
그리고 우리 부모의 직업도 자랑스러워 합시다.
나는 그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그 피를 이어받고 그 생명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그 직업의 댓가로 양육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직업을 참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그 '직업'(vocation)이 '성소'(Vocation)가 됩니다.
오늘 노동자의 날은
나의 직업에 감사함으로써 나의 성소를 경축하는 날입니다.
축하합니다~~^^
오상선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