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목요일]영원한 생명 (요한 3,31-36)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유다 지도자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도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시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깨달음과 용기를 주시기 때문에 그 성령을 받은 사도들 또한 부활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사도행전 5,27-33).
하늘에서 오신 아드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들으신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하늘에서 오신 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나 구원되기를 바라시지만, 먼저 그 아드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해야 할 몫이다 (요한 3,31-36).
시편 34(33),2와 9.17-18.19-20(◎ 7ㄱ)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또는 ◎ 알렐루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
○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3,17 참조). 그러나 심판은 있습니다. 그것도 먼 미래가 아니라 이미 그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빛과 어둠, 진리를 실천하는 이와 악을 저지르는 자, 아드님을 믿는 이와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자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사람들을 구분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들과 유다 지도자들, 복음 선포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행동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지난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였지만, 이제 부활 사건 앞에서 그 결단은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그분을 주님이시며 하느님으로 믿을 것인가? 그렇게 돌아가신 분께서 지금도 살아 계심을 믿고 있는가? 그래서 십자가가 생명의 길임을 믿고, 그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라나설 것인가?’
믿지 않는 자들은 생명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빛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박해자들의 모습에서 확인합니다. 그들은 자유롭지 못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또한 부활을 믿지 않으며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워 눈치만 살피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도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도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어둠이고 심판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랑을 거절하거나 물리칠 때 자신이 스스로를 죄짓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지만 이렇게 인간은 불신하고 거부하면서 그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앞에서 우리 인간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며, 그 선택에 따라 삶과 죽음이 판가름 납니다.
<예수님, 영원한 생명> 송영진 모세 신부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31-32)."
"위에서(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신다."는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모든 사람'입니다.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는 인간의 '한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가 알려 주지 않으면 '하늘 일'(요한 3,12)을 알 수 없고, 누가 인도해 주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냥 땅에서 살면서 보이는 것만 보고, 그것만 서로 이야기하다가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는 "예수님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닌 것,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알려 주시는 분이다."입니다. 여기서 '증언'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아무도'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는 표현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공부 좀 했다고 자부하면서 자기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과 지혜가 인간 세상에 관한 것일 뿐이라면, 그것은 '땅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진짜 지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입니다.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진짜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지각없는 짓입니다(욥 42,3).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들을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느님도 알게 되고, '하늘 일'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뒤를 따라간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요한 3,33)." 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써 그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사람이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확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 자체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하는 일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4-35)."
이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이고, 하느님의 성령과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고,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다."입니다. 뒤의 10장을 보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라는 예수님 말씀이 나옵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6)."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데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자이고,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생명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된다.'입니다. '진노가 위에 머무르다.' 라는 말은, 최후의 심판 날이 되기 전이라도 믿음과 생명을 거부함으로써 생명을 잃은 상태로 살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 됩니다. (믿고 순종함으로써 이미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세월호 침몰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어린 학생들이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 간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9명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1년 전에 침몰한 세월호는 단순히 항해하던 배가 침몰한 것이 아닙니다. 성장과 발전이라는 ‘바벨탑’을 향해 올라갔던 우리 사회의 또 다른 것들이 함께 침몰한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 우리는 양심과 도덕을 침몰시켰습니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침몰시켰습니다. 20년이던 배의 선령제한을 30년으로 늘렸습니다. 무리한 배의 증축은 뒷돈을 받았던 공무원들에 의해서 허가 되었습니다. 화물은 정상규모보다 1000톤 이상 더 선적하였고, 항해에 꼭 필요한 평형수를 흘려보냈습니다. 화물을 꼼꼼하게 묶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선장은 책임을 침몰시켰고, 국가는 국민을 재난으로부터 구해야할 책임을 침몰시켰습니다. 어린학생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장과 승무원들만 탈출을 했습니다. 국가는 재난의 현장을 민간 구조단체에 맡겨버렸습니다. 우왕좌왕 하는 시간에 우리의 아이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소통과 공감이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정부의 발표를 믿지 못하는 국민들이 있습니다. 진실을 규명하기를 바라는 유족들의 바람은 더 많은 배상을 받아내려는 욕심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소통과 공감의 침몰은 ‘지역, 계층, 세대, 이념’에 걸쳐 우리사회를 진한 먹구름으로 가리고 있으며 우리 사회를 반목과 불신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정부는 세월호의 인양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양해야 할 것은 차가운 바다 속에서 1년 넘게 가라앉은 배를 인양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라는 수렁에 깊이 빠져버린 우리들의 양심과 도덕을 인양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넓은 마음으로 감싸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양해야 할 것은 부정과 부패의 늪에 빠진 정의와 공정입니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법과 조직은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언제든지 무력할 수 있음을 우리는 지난날의 사고와 재난에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정의와 공정이 바로 서지 않으면 세월호와 같은 사고는 이름을 바꾸어 또 우리에게 다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인양해야 할 것은 불신과 반목의 바다에 깊이 빠져 버린 소통과 공감입니다. 편견과 아집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진실한 마음으로 위로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넓게 생각하는 이 지구는 광대한 우주에 작은 먼지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사는 한반도의 반쪽은 더 말해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사도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사도들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어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들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욕망, 시기, 질투, 불신, 분노, 원망의 삶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면, 함께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바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흔히 생각하듯 언젠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말한다.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 입니다.(1요한 5,13)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여기서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사랑의 관계다.
'안다'란 단어가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영생이 먼 훗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과 느낌으로 상대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와 온전히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생이란 예수님과 우리가 갈림 없이 일치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54)
오늘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년이 되는 날이다.
유가족들은 잊지 말아 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기억이 소중한 삶의 방식이듯 망각 역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다만 무엇을 얼마만큼 외면하고 망각 속으로 밀어낼지 선택하는 일은 인간 삶의 품격을 드러낸다.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잘 구별하는 일이야 말로 삶의 핵심을 간직하느냐 아니냐의 척도가 된다.
꽃다운 아이들의 두려움과 발버둥의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기억의 수면으로 떠오르면 부르르 몸이 떨리고 잠을 이룰 수 없다.
바다 속으로 서서히 가라않는 커다란 배를 TV 화면을 통해 생중계로 보면서 넋을 잃고,
발을 동동 구르며, 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지 않는지,
그리 자랑하던 과학과 기술은 대체 무엇하는가? 하며 통탄했던 것이 엊그제 같다.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가슴 아파 한다.
어떤 이는 그러니 이제 그만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정상적인 정치라면, 상식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라면 이렇게 1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송세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국가 권력은 도대체 뭐가 그리 감출 것이 많아 진실을 밝히는 일에 딴지만 거는 것일까?
세월호를 지워버리려고 안달하는 대한민국의 권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잊지 말아야 한다!
더 안전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거짓투성이인 권력의 해체를 통한 정의의 자리매김을 위해 ...
세월호 1년, 이제부터 기억은 필사적으로 다시 시작되어야 하고 그 기억을 통해 그 날 숨져간 아이들이 부활의 꽃으로 피어날 때 까지,
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와 함께 영원을 노래할 때 까지...멈추지 말아야 한다.
세월호의 모든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이 우리와 함께
지금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충만한 주님의 자비를 기도하고 청할 뿐이다.

부활 2주간 목요일 (요한3,31-36)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반영억라파엘신부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6-15-17).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신중한 처신이 요구됩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여기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의 생명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그분이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도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고 오신 분, 아버지의 사랑 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느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믿음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영생을 기뻐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면 할수록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삶을 갈망하고, 지금으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 보다는 멸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22,14)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로 초대받았지만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