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월요일] 물과 성령(요한복음 3,1-8)

2015. 4. 13. 오전 7: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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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월요일] 물과 성령(요한복음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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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풀려난 사도들은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사도행전은, 시편 제2편을 인용하면서 헤로데와 빌라도가 기름부음받은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저지른 사건 안에서 이 시편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사도행전 4,23-31).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들을 보고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시라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이르신다((요한복음 3,1-8)).

 

 복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빠다킹신부 묵상

시편 2,1-3.4-6.7-9(◎ 12ㄷ 참조)
◎ 주님, 당신께 피신하는 이 모두 행복하옵니다. (또는 ◎ 알렐루야.)
○ 어찌하여 민족들은 술렁거리며, 겨레들은 헛된 일을 꾸며 대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메시아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일어나며, 군주들이 모여 음모를 꾸미는구나. “저들의 오랏줄을 끊어 버리고, 저들의 사슬을 벗어 던지자.” ◎
○ 하늘에 앉아 계신 분이 웃으신다. 주님이 그들을 비웃으신다. 마침내 진노하시어 꾸짖으시고, 분노하시어 그들을 떨게 하시리라.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
○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부수고, 옹기그릇 바수듯 바수어 버리리라.” ◎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복음 3,1-8)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당시 지도층으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도들은,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계속 복음을 선포합니다. 시편에서 말하듯이, 민족들과 군주들이 일어나 기름부음받은이를 죽였으므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도 당연히 위험을 겪으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협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선포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기도를 마치고 성령으로 가득 차 그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담대함’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만 특히 사도행전에서 자주 사용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사도 2,29; 4,13.29.31; 28,31 참조).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또는 공공연하게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용감하게 다하는 것을 뜻하는 이 단어는,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말로서 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미 위협을 받은 상태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을 체험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순교도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가질 수 없는 담대함을 먼저 하느님께 간청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바오로 사도도 수인으로 로마에 잡혀 와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아주 담대히” 복음을 선포합니다(사도 28,31 참조).
결국 사도들은 모두 복음을 선포하다가 장엄하게 순교할 것입니다. 마치 순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의 눈총이나 거부나 박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가 성령의 힘이 아닌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려움이나 십자가를 치워 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 ‘담대함’을 청한 사도들처럼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의탁,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생활 방식입니다.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그런데 그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자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 3,5-6)."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례성사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물과 성령은 세례성사를 가리킵니다.)

태어난다는 말은 새 생명을 얻는 것, 또는 새 인생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허무하게 멸망할 것이다."입니다.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페 4,22-23)." 세례성사는 옛 인간이 '죽는' 성사이면서, 동시에 새 인간으로 '새로 태어나는' 성사입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면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업적을 많이 쌓아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서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을 듣고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 3,4)" 라고 질문합니다. 그는 태어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에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연상됩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 인간'이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그것은 쉬운 일이 됩니다. 하려고만 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이 될 것이고, 회개 자체를 안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마음속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고, 그 욕망대로 살기를 바란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각자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변화되어서 '새 인간'이 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 사도가 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인도해 주신 일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도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도들을 비롯해서 모든 신앙인이 새로 태어나고 변화되어서 '새 인간'이 된 사람들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유아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도 회개하면 '새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멸시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누구든지 한 번 죄를 지으면 그것으로 그냥 그의 인생이 끝나버린다면, 메시아의 구원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3,17).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회개와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타락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게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도 '새 인간'으로 변화되어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한 번 물과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은 아니고,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지금 '거룩한 성인'으로 존경 받는다고 해도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 성인품에 오를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사도들은 유다가 배반자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유다 자신도 자기가 배반자가 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죽기 전까지는 모든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에 어떤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서느냐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또 내일,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이미 죄인이 되어버렸다고 포기하지도 말고, 지금 죄가 없다고 큰소리치지도 말고...)

 

 

위로부터 태어나야   반영억라파엘 신부

 

무엇을 배우는 사람은 가능한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지도를 받기 원합니다. 그래야 효과 있게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야 기초가 바로 섭니다. 그러나 유명한 사람도 좋지만 성실하고 눈높이를 맞춰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너무 잘 나서 바닥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간혹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수준 이하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운동이나 피아노를 배우는데 있어서 전문가의 지도를 받을 때는 제대로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기초가 서기도 전에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가르쳐 준다고 하여 그것을 따라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한편 오래도록 꾸준한 훈련과 연습을 한 사람의 수고와 땀을 인정하지 못하고 단 번에 그들보다 더 나은 운동선수나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욕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일에도 좋은 선생을 만나기 바라는데 하물며 우리 인생사의 스승을 모시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음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요 한3,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는데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영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의 틀에 매여 있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맡기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을 뿐더러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 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8)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과 인간논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성령께 의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 사람의 삶은 바람이 제 불고 싶은 데로 불듯이(요한 3,8) 더 이상 틀에 박힌 삶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에 드는 자유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그런데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잊지 마십시오. 매순간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말씀 안에 거듭 태어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에게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도 4,29)

보통 우리는
어려움이나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그것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십사 청하게 되지요.

나에게 다가오는 짐이나 무겁게 느껴지는 십자가를
할 수 있으면 안 질 수 있게 해 주시거나
그것을 벗어 던지고 갈 수 있게 해 주십사 청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야속하게도...

오늘 사도들도
그러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과연 예수님의 제자답게
그 때문에 비겁해지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지고 갈 수 있게  해 주십사 청합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온갖 은총과 축복으로 그들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오늘 나에게도 회피하고 싶고
지고 싶지 않은 어려움이나 십자가가 다가올 수 있습니다.
피하지 말고
그것을 담대히 지고 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십시오.
그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다운 모습입니다.
그러실거죠?

오상선바오로 신부

 

요즘 제가 주로 준비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평화방송과 함께 제작하려고 하는 사제 양성과 사제의 삶에 대한 다큐 작업입니다. 성소국에 있으면서 사제 양성과정, 사제란 누구인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제상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여름에 있을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성경 통독프로그램입니다. 사제를 지망하는 예비신학생들이 성경을 함께 읽고, 성경의 내용을 함께 묵상하고, 나누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있을 성소주일행사에 대한 준비입니다.

올해는 예비신학생들과 부모님을 초대해서 강의를 듣고, 기숙사도 들러보고, 함께 묵주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일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들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밥은 물론 다른 것들을 채워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과 동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신앙인은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빵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채우면서 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사도들은 수동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들을 다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만 바라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변하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들을 스스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였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표징을 보여주었고,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빵만으로 사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고, 표징을 보인다면, 설사 죽음을 당하더라도 다시 살아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배추 애벌레는 온 몸이 굳어 죽은 것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애벌레의 삶과 나비의 삶은 차원이 다른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 기쁨,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 과정이 때로 고통이고, 아픔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을 거쳐야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부활 2주 월요일 2015 - 04 -13     김오석 라이문도 신부님( 일산 주엽 성당)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5)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나 구원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성서 원문에서는 태어나다는 동사가 수동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시 태어나는 일은 철저히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임을 말해준다.

거듭남의 여부가 인간의 공덕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 기도를 했느냐, 선행을 했느냐가 구원의 절대적 선결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분 사랑에 감사드리고 찬양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응답을 드리는 것이지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무조건적인 선물이다.

자칫 선행과 절처한 게명 준수와 열심한 신앙생활로 교만에 빠진 사람들의 경우 하느님이 주시는 무상의 은총을 인간적 행위의 결과로 잘못 생각할 가능성이 많다.

또한 자신처럼 열심히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쉽게 단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기에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철저히 의존하는 창녀와 세리들이

바리사이들 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포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다.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온전히 의존해야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죄인임을 부정하는 교만이 가장 큰 죄가 되는 이유이다.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이고, 제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겸손이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겸손하게 무릎 끓고 내 자신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 은총이 필요한 존재임을 느끼고,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의 바다에 잠기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좋겠다.

 

 성령의 충만을 위해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의 17가지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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