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수요일>가리옷 유다(마태 26,14-25)(이사야 50,4-9ㄴ)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 종은 주 하느님께서 자기를 가르치시면서 맡겨 주시는 사명을 수행하며 겪게 되는 고통을 이야기한다. 그는 모욕과 수모를 피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순종하여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에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제1독서).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팔아넘기지만, 주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수난을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신다. 불행한 것은 배신을 당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배반하는 유다이다(복음).
시편 69(68),8-10.21-22.31과 33-34(◎ 14ㄴㄷ 참조)
◎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 ◎
○ 제 마음이 모욕으로 바수어져, 저는 절망에 빠졌나이다. 동정을 바랐건만 헛되었고, 위로해 줄 이도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은 저에게 먹으라 쓸개를 주고, 목마를 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나이다. ◎
○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자’인데, 주님의 종과 유다 이스카리옷의 모습은 너무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사야서에서 사용된 히브리 말 단어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라는 더 수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자로서 주님의 종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가르치시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람들을 격려할 뿐 아니라 매질과 모욕과 수모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와 함께 계시면서 자기를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스로 제자의 신분을 저버립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려 했다는 것은 이미 그분께 배우는 사람이기를 그만둔다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고 말씀하시는데, 떠나가는 주체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길이기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렇지만 유다는 그 길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갑니다. 죽임을 당하실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이들과 손을 잡습니다.
성주간의 성삼일 전례를 앞둔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떤 길을 가야 하며 어떠한 운명이 기다리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길을 따라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인내하면서 꿋꿋이 걸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팔아 내 뜻을 이루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을 맞게 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제자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지도, 당신의 억울한 죽음을 불행으로 생각하지도 않으십니다. 저항하지 않으시면서 사랑에 호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위대하고 고결합니다. 비참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의 신분을 내던지고 그 길을 벗어나려 하는 유다입니다.
<유다> 송영진 모세 신부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 26,14-16)."
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가 되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박해자들에게 직접 넘긴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길 안내만 했을 뿐입니다.만일에 유다가 배반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아닙니다. 유다가 배반하지 않았더라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일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의 배반은 당시 상황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고,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이 좀 더 빠르게 진행되도록 도와준 일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유다는 박해자들과 같은 편에 섰기 때문에 그는 배반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박해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예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가신다는 말은, 유다가 배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박해는 진행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미리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일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아무리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작용한 일이라고 해도, 또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죽인 살인죄까지도 하느님의 뜻에 포함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또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사람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범죄자들입니다.
('광복'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식민 지배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범죄입니다. 병이 낫고 건강을 되찾게 된 일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고 감사드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 자체가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병'은 그냥 '악'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일의 전체 과정에서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악'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오직 '선'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치 유다의 운명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말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유다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겪게 될 불행이 가혹하다는 뜻입니다. 그 불행은(멸망은) 그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이 말씀에서 '자신에게' 라는 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했다면, 그것은 그 자신에게 행복한 일이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묵시록을 보면, '생명의 책'이라는 책이 나오고,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땅의 주민들 가운데 세상 창조 때부터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묵시 17,8)"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5)."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7)."
이런 구절들만 보면,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거나 지워지는 것은 각자 자기가 어떻게 하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묵시 3,5)." 생명의 책은 이름이 새로 기록되거나, 또는 기록되어 있는 이름이 지워지기도 하는 그런 책입니다. 결국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처음에는 사도들 명단에 한 사람의 사도로서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었고, 생명의 책에도 이름이 기록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반을 함으로써 사도들의 명단에서도, 또 생명의 책에서도 자기의 이름을 자기 스스로 지워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반영억신부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행려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였는데 분명 아침미사참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파스타를 먹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본인을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 사제관에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 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 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약속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혼인계약으로 새 가정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약속들, 부모와 자녀, 이웃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유다를 쉽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고 고백한 한상봉씨의 말씀이 크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이사 50,7)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엘리어트의 "황무지" 주검의 매장 단락을 다시 읽어봅니다.
1년전 성주간 수요일
우리는 세월호 침몰로 가장 잔인한 달을 맞았었지요.
황무지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듯이
세월호의 아픔에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희망이 보이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주님의 종은
어떤 고통과 모욕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굳게 믿으니 늘 희망의 사람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어떤 고통과 모욕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진실을 규명하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굳게 믿음으로써
죽은 아이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리란 희망을 잃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도 어떤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주님께서 여러분 편이심을 잊지말고
꿋꿋이 견디시는 오늘 되십시오.
이제 부활은 얼마남지 않았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