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사순 제 4주간 월요일
오늘 제1독서는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해 오신 하느님의 모든 업적을 능가하는, 놀라운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이 새로운 창조 앞에서는 과거의 업적들은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사야서 65,17-21).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의 능력으로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실 때, 사람들은 이 표징을 보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심을 믿게 된다. (요한 4,43-54).
시편 30(29),2와 4.5-6.11-12ㄱ과 13ㄴ(◎ 2ㄱㄴ 참조)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 주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당신이 제 목숨 저승에서 건지시고,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
○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
○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요한 4,43-5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43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이번 주부터 부활 때까지 요한 복음을 이어서 묵상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현양되시는 그분의 ‘때’가 되기 전까지 여러 표징을 전해 줍니다.
표징은 믿음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만,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표징 자체도 거부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표징을 모두 보여 주신 다음,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12,37) 하고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징을 보여 주신 장소는 갈릴래아 카나이지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카나 사람이 아닌 이방인 왕실 관리였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와 자기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했던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그의 아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죽어 가는 한 아이를 살아나게 하시는 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바로 그 시작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싹트고 있음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보라”(이사 65,17).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라는 뜻입니다.
약속은 이미 성취되고 있고 그 완성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병든 아이를 일으키시는 그분께서는 장차 죽은 라자로를 살아나게 하실 것이고, 당신 자신도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것이며, 아울러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표징은 신앙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표징을 알아보고 믿는 이들은 이미 구원되어 생명을 누립니다.
<믿음> 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거절하시는 것 같은 말씀이지만 거절은 아니고, "표징과 이적을 찾기 전에 먼저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표징(기적)만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아니고, 지금 죽어가는 자기 아들을 살리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온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사정과 그의 심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믿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믿어야만' 그의 아들을 고쳐 주시겠다는 뜻은 아니고, 아들을 고쳐 주시는 은총뿐만 아니라 '믿음의 은총'도 주시기 위한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경우도 이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딸을 고쳐 달라고 청했을 때(마르 7,25-26),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겉으로만 보면 거절하시는 것 같은 말씀인데, 거절은 아니고,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 라는 뜻이고,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시는 은총뿐만 아니라 그 여자에게 '믿음의 은총'도 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자녀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뜻하고, 강아지는 우상 숭배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왕실 관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든 그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9)." 라고 다시 간절하게 청합니다.
어쩌면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대화가 더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왕실 관리의 말 앞에 뭔가 생략된 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더라도 믿겠습니다. 그러니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그렇다면 그의 말은 "아들을 고쳐 주신다면 믿겠습니다."가 아니고, "믿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입니다.
이 상황과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귀 들린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한 일이 있습니다. "...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믿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저에게 믿음이 없더라도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가 아닙니다.) 이 말은 믿음도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마도 왕실 관리도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면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경우에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제가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은총의 부스러기 정도는 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라는 뜻인데, 자기가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앞으로는' 자녀가 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믿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신 것은 강아지(우상 숭배자)의 딸을 고쳐 주신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의 딸을 고쳐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실 관리가 믿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음을 보셨습니다. 그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라는 예수님 말씀만 믿고 떠나간 것은 믿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음을, 또는 믿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아들을 고쳐 주신 일은 표징과 이적만 찾는 사람의 아들을 고쳐 주신 일이 아니라,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아도 믿는(또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아들을 고쳐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도 없이 표징만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왕실 관리가 아직 결과를 보기 전이었는데도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떠나간 때입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되고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믿음이란, 내가 바라는 대로 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는 자신의 사정을 말씀드리면서 도와달라고 청하는 것까지만 하고, 그 일의 해결 방법과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53절에 있는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는 말은 그의 믿음이 마지막 단계에까지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구원을 부른 고통 반영억 신부
왕실의 한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누웠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예수님께 쫓아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관리는 예수님께 관심도 없던 사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기적을 행하실 때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에게 고통이 왔기 때문에 위신 체면 다 버리고 예수님께 달려와서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닥친 시련은 불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주님,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8-49). 하며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는 예수님의 응답을 얻어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 사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관리를 애원하게 했고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면박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는 말씀에 두 말 없이 믿음을 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왕실의 관리의 믿음이 만나서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요한4,53).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주십니다”(야고5,10). 시련과 고통은 은총의 기회이고 기적을 낳는 원천입니다.
믿음 없이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제서 밤을 지새가며 기도하고 부산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우리의 간청에 당신의 계획마저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시길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낫게 해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지 혜16,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4,12-13).
그러므로 내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심을 믿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로마12,12).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고통은 결코 죄의 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고통 이라할지라도....
이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욱 튼튼하여지고 아름다워지길 빕니다. 우리는 믿음의 특권에서 오는 고난의 특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곧 영광의 특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기도란?
1. 하느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영적인 포복이다.
2. 세상 욕심의 발전소가 아니라 욕망의 불을 끄는 소방서이다.
3. 기도가 없을 때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무거워지고,
기도가 있을 때 마음은 성령과 천상의 것으로 충만하다.
4. 세상에서 가장 줄을 잘 서는 방법이다.
5. 세상의 성공에는 후유증이 따르나 기도에는 후유증도 뒤탈도 전혀 없다.
6. 세상의 모든 후원에는 용수철처럼 조건이 달려 있지만
기도에는 기도하는 사람을 하느님 아버지께 매어다는 용수철이 달려 있다.
7. 기도 없는 곳에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일하신다.
8. ‘노력 더하기 노력’이 아니라 나의 ‘노력 곱하기 노력’이다.
9. 기도가 없는 곳은 마귀의 잔치집이고, 기도가 있는 곳은 마귀의 초상집이다.
10. 하느님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기도하는 사람은 삶으로 하느님께 응답한다.
‘새 하늘과 새 땅’ 조재형 신부
시간은 흐른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말을 합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는 태어나고, 나이를 먹고, 병이 들고, 죽어 땅에 묻히게 됩니다.
50년을 조금 넘긴 세월을 살면서 저 역시 나이를 먹고, 때로 아프기도 했고,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저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됩니다. ‘엔트로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간 속에서 질서는 점차 무질서를 향해서 나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시간의 이해는 서양에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시간의 이해 속에서 우리는 진보, 발전, 성장, 오메가 포인트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갔습니다.
시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시간은 순환한다는 생각입니다. 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는 생각입니다. 자연의 시대, 신의 시대, 이성의 시대가 반복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패션도, 문학도, 예술도 새로운 유행을 만들기도 하고, 예전의 흐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고 말을 합니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시간은 분명 흐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시적인 측면에서 시간은 순환하는 것도 같습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습니다. 태양은 또 다른 중심을 향해서 공전하고 있습니다.
그 순환의 주기가 어떤 것은 하루, 어떤 것은 30일, 어떤 것은 1년, 어떤 것은 몇 억년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의 이해는 동양에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시간의 이해 속에서 우리는 겸손, 순응, 천륜, 기다림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갔습니다.
하루를 살아야하는 하루살이에게 인간의 삶은 영원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100년을 살아가는 인간에서 100억년은 어쩌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시간을 길이와 흐름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나무는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간에서 의미와 가치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영원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