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금요일>(2015. 2. 27. 금)(마태 5,20ㄴ-26)

에제키엘 예언자는 백성의 회개를 독려하고 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제1독서에제키엘 18,21-28).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화해’에 대해 가르치시며 형제를 미워하고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은 살인의 시작과 같다고 하신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복음 마태오 5,20ㄴ-26).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마태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좋을 때는 우애롭고 화평하다. 문제는 화가 날 때이다. 분노를 잘 다스리는 것이 조화로운 삶의 비결이다. 누구나 분노할 수는 있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화났을 때 결정하지 않는다.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는 최악의 결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일본의 ‘야마기시 미요조’(야마기시즘 실현지 창설자)라는 농부는 어린 시절 ‘사람은 왜 화를 낼까?’라는 물음으로 10년을 궁리했다. 그는 마침내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깨달음에 이르러,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존중하는 데 행복한 삶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실천했다. 그는 그러한 믿음을 벼농사와 양계에까지 적용했다.
재세례파인 ‘부르더호프 공동체’ 가족은 예배가 시작되면 먼저 감정이 상한 형제를 불러 밖으로 나가서 화해하고 들어온다. 예물을 바치기 전에 그렇게 하라고 복음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대화가 길어져 예배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예배보다 용서와 화해를 더 소중히 여기며 사이좋음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믿음에 충실하다. 그들은 대화할 때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않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마태 18,15)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데, 이를 ‘사랑으로 직접 말하기’라 한다.
기질적으로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공동체 관계가 좋지 못하여 문제의 장본인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형제가 다른 사람의 잔소리를 듣기 위해서 공동체에 들어온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기 생각이 반드시 옳다는 믿음을 버리고, 타인의 허물을 들추지 말며, 화났을 때 말하지 않기만 실천해도 놀랍게 변화될 것이다.

<화해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신앙생활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들처럼 하지 마라."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위선이었기 때문입니다(마태 6,5).
가장 큰 문제는 그들에게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시비를 건 일이 좋은 예입니다(마태 12,1-2). 그들은 사람들의 사정은 보지 않았고, 안식일 규정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일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고, 형제와 화해하는 일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먼저' 라는 말은 '하느님은 나중에'가 아니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때의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형제가 무엇 때문에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형제가'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고, 둘 다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지금 중요한 것은 형제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원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와 내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더 잘못했는가, 원인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를 따지지 말고 화해부터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먼저' 라는 말은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이기도 하고, '형제보다 먼저'이기도 합니다. 그 형제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형제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완성됩니다.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위선'입니다(1요한 4,20).
("그러면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안 믿는 무신론자들도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의 경우는 따로 생각할 일이고, 우리는 신앙인들의 경우에 대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인들이 이웃 사랑 실천은 잘하면서도 하느님 사랑 실천은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형제와 화목하게 지내면서도 부모에게는 불효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해하려고 형제를 찾아갔는데 그가 화해하기를 거절한다면?"
1) 잘못이 '내 쪽에' 있어서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려고 찾아간 경우. 형제가 나를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 그의 잘못이고, 그가 마음을 풀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면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2) 잘못이 '그쪽에' 있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그를 찾아가서 그와 화해하려고 했는데 그가 화해하기를 거절하는 경우. 화해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화해하겠다고 찾아간 나의 태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용서를 청할 때 필요한 자세가 '겸손'인 것처럼 화해할 때에도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잘못은 너에게 있다."는 오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죄 없는' 내가 '죄인인' 그를 용서하는 일이 아닙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것을 잊으면, 형제와 화해하려고 찾아간 일이 '교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화해를 원한다면, 자신을 낮추어서 형제의 위치로 내려가야 합니다.
실제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신앙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필리 2,5-8ㄱ)."

바보, 멍청이 반영억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나 행위를 듣거나 보고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주님의 사랑, 자비와 용서가 없었다면 오늘이 없을 것입니다. 은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별 뜻 없이 던진 말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입니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한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선택 ]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인간과 동물은 유전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없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말을 합니다. 죽고 싶은 것도 ‘마음’ 때문입니다. 원망과 분노도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도 ‘마음’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마음은 나도 몰라!’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됩니다.
Enneagram(애니어그램)은 사람의 마음을 9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MBTI(엠비티아이)는 사람의 마음을 16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저는 생각이 깊은 유형이 아닙니다. 직관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유형도 아닙니다. 내면의 깊이를 파고드는 성격도 아닙디다. 남들 앞에서 일을 주도하는 성격도 아닙니다. 저는 감성적이며, 협조자형입니다. 논리와 판단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만나면 답답합니다. 일을 추진하기 보다는 인간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편입니다.
맹자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4가지의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겸손한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교육은 이 마음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자비심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에 대해서 묵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를 배반할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많은 경우에 배반은 절친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 봅니다. 많은 것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을 봅니다. 본당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단체의 간부들끼리도 없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흉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배반은 사제/ 수녀/ 평신도 모두에게서 나타나곤 합니다.
저는 교구에 있을 때 본당에서 ‘투서’를 보내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본당 신부님을 비난하는 그 사람은 사실 본당 신부님과 늘 가까운 자리에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그 유다와 비교해서 “나는 아니죠!”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늘 모범생이었고, 예수님께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똑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와 베드로의 삶은 그 끝이 달랐습니다. 유다는 절망하였고, 희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려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배반을 묻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나는 주님이 힘들어하실 때, 주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실 때, 어쩌면 늘 주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 노력해도
나 때문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는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나의 고의가 아니라도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 때문에 분노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어쨌거나 나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청하며
그를 위해 보속의 기도를 바쳐주는 일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구요?
하느님이 나에게 그렇게 해주시니까요.
오늘 행여라도
나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가진 형제가 없는지 한번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맘으로라도 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를 위해 작은 기도와 희생을 바쳐보면 어떨까요?
오상선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