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2015. 2. 20. 금)(마태 9,14-15)

<단식> 송영진 모세 신부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당시에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해서(마태 6,16) 자주 단식했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극기고행을 본받아서 자주 단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은 혼인 잔치의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하십니다.
'혼인 잔치, 신랑' 등의 표현은 세례자 요한이 먼저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지금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요한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부러 요한이 사용했던 표현을 빌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혼인 잔치'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와 계신 상황을 가리킵니다.
'손님들'은 제자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실제로 손님이라는 뜻은 아니고,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은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표현일 뿐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부활 전까지의 시간 동안에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예수님의 수난을 기념하고 수난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단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선교사로 파견하기 전에 공동체가 함께 단식하며 기도했다는 내용이 있고(사도 13,3), 교회 원로들을 임명할 때에도 단식하며 기도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사도 14,23). 그때의 단식은 참회나 슬픔을 뜻하지는 않고, 기도의 일부로서 '헌신'을 뜻하는 단식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는 '신랑을 빼앗길 날'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랑을 잃는 날'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신랑을 떠나는 날'입니다. 양이 목자를 떠나서 방황할 때, 즉 '잃은 양'이 될 때가 바로 그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방탕하게 살던 작은아들이 굶주림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는 것은(루카 15,17)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스스로 단식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떻든 그는 배고픔 때문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렇게 정신을 차린다는 뜻으로 '단식'을 한다면, 이것은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되돌아가는 일의 시작, 또 목자를 떠난 양이 목자를 찾는 일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단식은 굶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나누어 받는다는 뜻이 되고, 또 우리의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단식만 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단식을 함으로써 남게 된 음식을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느님 나라에서는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는 참회를 할 이유도 없고, 슬픔도 없고...
어떻든 일부러 단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마음 편하게 먹지 못하는 일은 많을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또는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가엾어서,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스스로 단식기도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함께 먹거나 함께 굶는 것입니다. 먹든지 굶든지 간에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굶고 있을 때 혼자 먹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또 성모님도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 마음 편하게 음식을 잡수시지 못하고, 굶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쪽에서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면, 그 아버지는 집에서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을까? 아마 아버지도 굶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작은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여 주었지만, 작은 아들은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굶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너무나도 죄송스러워서 마음껏 잔치 음식을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잔치 음식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단식에는 이렇게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또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생각하면서, 또 우리 삶을 반성한다는 뜻으로, 또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친다는 뜻으로 단식합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단식은 '사랑'입니다.
육적인 욕망을 끊어라 반영억신부
'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 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단식은 왜 하는가? 주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요, 이웃사랑에 열려있기 위함입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 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지적합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이사58,3). 한다면 그것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지 단식이 아닙니다.
주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58,6-7).입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욕망을 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아진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 종일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구엔반 투안).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6-7)
이번 사순절 시작이
설날과 겹치는 바람에 단식은 못하고 계시죠?
그렇다고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오늘 사순절 첫금요일 독서와 복음의 주제가 단식이네요.
그런데도 설날 명절을 지내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육신의 단식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귀를 기울이라네요.
교황님도 이번 사순절 메시지에서 가장 강조한 것이
'무관심'의 확산을 막자는 것이었지요?
오늘 비록 단식은 안해도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가족, 친지,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잊지 않았으면해요.
그래야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의 단식 안함이 어떤 의미인지
더 잘 알게 될테니까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오상선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