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는 모세의 가르침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공동체로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계율을 전한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제1독서레위기19,1-2.11-18). 최후의 심판을 예언적으로 서술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가련한 이를 당신의 형제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신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교회는 이 복음을 장례 미사에서도 봉독한다. 죽은 이가 떠나면서 듣는 마지막 말씀이다(복음마태오 25,31-46).

전문 분야를 공부하면서 구직에 필요한 각종 자격증도 따고 면접 준비도 열심히 한 뒤 입사 시험을 보는데 면접관의 이런 질문을 받았다. “사람은 왜 화를 내지요?” 얼떨결에 “기분 나쁘니까 화를 내는 거지요.”라고 대답했다. “기분 나쁘다고 부모나 고객 앞에서 화를 내면 안 되겠지요?” 허를 찔린 것이다.
주일 미사도 기도 생활도 열심이었던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 심판대에 섰다. “나는 내 몸을 네 양식으로 내어 주었는데 너는 굶주린 나에게 자장면 한 그릇도 사 주지 않더구나? 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의 모습으로 네 곁에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신앙생활의 허를 찔린다는 오늘의 복음 말씀이다.
우리는 다행히도 복음서의 친절한 정보 때문에 내 신앙생활은 이웃을 향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죽음을 맞았을 때 주님께서 물으셨다. “너는 성당에는 다니면서 왜 미신을 믿고 악령의 졸개로 살아왔느냐?” 황당해서 대답했다. “저는 사주팔자 한번 본 적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너무 바빠서 내 복음을 듣고 기도하며 사랑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텔레비전과 휴대 전화에게는 매일 두 시간 이상씩 예배하며 살았지. 내가 창조한 밤과 낮, 계절을 거슬러 달도 별도 보지 않고 밤을 대낮같이 밝히고 겨울을 여름처럼 살며 낭비하고 핵 발전소를 지어 갔다. 내가 만든 땅에는 소유권도 국경도 그어 놓지 않았는데 땅문서는 누가 만들었고 전쟁은 왜 지지했느냐? 이웃 돕기에는 인색하면서 옷과 가방은 수십 배의 웃돈을 주고 명품을 사더구나. 누가 시켰느냐? 유혹자였지? 악령의 사주 아닌 것이 있으면 어디 내놓아 보아라!”
최후 심판에서야 찬란한 소비문화가 그리스도의 적, 곧 악령의 실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최후의 심판> 송영진 모세 신부
2월 23일의 복음 말씀은 '최후의 심판'(마태 25,31-46)인데, '사랑의 실천'이 심판 기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 동안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실천해야 할 일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마태 25,35-36)" 라고 말씀하시자, 의인들은 "주님, 저희가 언제...?(마태 25,37-39)" 라고 질문합니다.
의인들은 '작은 이들'이 주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닌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마태 25,42-43)" 라고 말씀하시자, 그들도 "주님, 저희가 언제...?(마태 25,44)" 라고 질문합니다.
의인이 아닌 자들도 '작은 이들'이 주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아니니까 사랑 실천을 안 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의인이 아닌 자들이 한 말은, "주님께서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모습으로 저희에게 오셨다면저희는 당연히 주님께 사랑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저희에게 오신 적이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자기들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만일에 '작은 이들'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의인이 아닌 자들은 주님이신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을까? 겉으로는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속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몰랐다는 것이 그들의 죄일까? 주님의 심판은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의인들이나 의인이 아닌 자들이나 모두 '작은 이들'이 주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같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의인들은 사랑을 실천했고, 의인이 아닌 자들은 안 했습니다.
'작은 이들'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 말씀의 내용을 겉으로만 보면, "'작은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가 강조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진짜로 강조하시는 것은 그게 아니라,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이들'이 바로 주님이다."만 강조한다면, 만일에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 경우에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이들'이 주님이 아니더라도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도 "작은 이들이 바로 나다." 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주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 또는 "이웃 사랑 없는 주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것은 그 사람을 주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는 순간 가엾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루카 10,33). 그 모습이 바로 '최후의 심판' 때에 오른쪽에 있는 의인들의 모습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버리는데, 사제와 레위인이 성전 예배 때문에 부정 타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 생각하고, 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외면한 것이 됩니다. 그런 경우에 그들의 '하느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그러면 최후의 심판 때 왼쪽에 있는 자들, 즉 의인이 아닌 자들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는가? 그들이 몰라서 그랬다면, 알려 준 다음에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는가?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최후의' 심판, 즉 더 이상 기회가 없는 마지막 심판입니다. 따라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요청이 통하지 않습니다.
"미리 알려 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라고 항의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최후의 심판'은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진짜로 최후의 심판 때가 되면,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미리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또 우리의 지금의 '삶'은 나중에 받게 될 심판의 선고에 그대로 직결됩니다. 심판 때가 되면, 자신의 예상과 다른 선고를 받고 놀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심판 전에 이미 자신이 받게 될 선고를 알게 됩니다. 자기가 살았던 그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사실상 '지금' 자신이 선택합니다.

자비의 섬이 되어라 반영억라파엘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사순담화를 통하여 무관심이라는 이기적인 태도와 맞서 싸워야 할 것을 권고하시며 "교회가 있는 모든 곳이, 특히 본당과 공동체가 무관심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자비의 섬"이 되기를 간절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관심과 혼자 힘으로 충분하다는 우리의 자만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 사순시기를 마음을 양성할 기회로 삼기를' 바라시며 "자비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강하고 굳세며, 유혹자에게는 닫혀 있으나 하느님께는 열려있는 마음을 지녀야 "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하고 기도할 것을 청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굳세고 자비로운 마음, 세심하고 너그러운 마음,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무관심의 세계화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적도 있습니다. "저는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줬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진정한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
제가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어느 날,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인 듯했습니다. 은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저는 눈을 마주하거나 손을 잡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 기도 했더라면......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듯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 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자비의 섬'이 될 때입니다.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 25,35-36)
내가 먹을 것이 없을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겠지요.
또 내가 목마를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물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겠지요.
내가 외국 나가서 어리버리할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를 환대해 준 사람이겠지요.
내가 병이 들어 누워있을 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병문안을 와 준 사람이고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도와준 사람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겠지요.
이렇게 당연한 것인데도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면 그 사람도 천국의 위안을 받고
나도 천국의 기쁨을 누릴텐데...
여러분은 그런 분이시라고 믿습니다.
순간의 귀찮음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나의 작은 수고로 천국을 나누어주고
나도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에 참으로 복되십니다.
오늘도 그렇게 살아봅시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오상선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