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마르코 8,1-10).

2015. 2. 14. 오전 8:09:08

글자

 [말씀초대]

창조주의 계명을 저버린 사람은 마침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괴로움 속에서 자식을 낳고 땀 흘리며 노동해야 한다. 인류의 생로병사가 시작된 것이다(창세기 3,9-24).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 머물렀던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빵의 기적을 베푸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한 모습을 보여 주신다.(마르코8,1-10).     

 

예수님성화

   [복음말씀]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마르코 8,1-10).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을 때 사천 명이나 되는 군중이 모여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흘 동안이나 꼼짝하지 않고 배고픔도 잊은 채 당신 말씀을 듣고 있었으니 그렇게도 좋았을까? 주님께서 마련하신 모임은 평화의 공동체다. 군중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빵을 내놓자고 하셨다. 그리고 감사 기도를 바치셨다.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고 나누시자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천 명이 먹고도 남을 양식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베푸셨다. 인정이 하느님의 마음이고 곧 기적이다. 주먹밥 하나를 내놓고 나누어 먹은 사람은 ‘이웃 때문에 내 몫이 줄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몰래 혼자 먹는 사람은 빼앗길까 싶어 불안하다.
밥을 나눌 수 없는 것은 삶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전통적 마을은 의식주가 열려 있었다. 마을이 공동체여서 홀로 사는 삶이 없었다. 현대인의 아파트와 다가구 주택은 가족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살고 있지만 벽은 두껍고 멀기만 하다. 이웃이 실직했는지 아이들이 굶는지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 구청 복지 담당자의 책임이다. 삶터마저 부촌과 빈촌으로 확연히 갈라져 간다. 인정은 연민의 눈빛에서 나오는데 눈을 마주치지 않으므로 따뜻한 마음이 서로에게 흐르지 못한다.
사도행전은 공동체가 빵의 기적이 체험되는 곳임을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에서 보여 준다(2,42-47; 4,32-37 참조).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4,34). 공동체는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왜 우리 시대의 대안의 삶인지를 드러내는 성사이다.     

 


 

                      기적을 낳는 사람        반영억신부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말씀도 듣고 치유의 은혜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하시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8,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 놓을 생각은 않고 머리로 계산을 하였습니다. 물론 자기들이 가진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인지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물으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고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였더니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예수님의 손을 거치면 이렇게 풍요로워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도구로 삼아 일을 하십니다.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제자들의 손을 통해서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먼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배 불리시고 영적으로 풍요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주 성경을 읽고 영성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십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믿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기적은 매 순간 이루어 집니다.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항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 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적인 것이든지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를 사용하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행위를 통해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먼데서 온 사람들의 걱정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배려에 배제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풍요롭게 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사랑합니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님은 누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사람들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 등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누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것과 사람들이 배고파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마르 8,1).

예수님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 분입니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요한 2,25)."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서는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사람들의 사정을 말씀드린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씀드리기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요한 6,5-6).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가르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예수님도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모르고 계실 것 같아서 알려 드리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우리 쪽에서 잘 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자비'입니다. '자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일이 '원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웃인가 원수인가를 따지지 않고, 의인인가 악인인가를 묻지 않고, 그 사람의 처지만 생각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자비'입니다(루카 6,32-35).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마태오복음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자비'는 '완전함'과 같습니다.

이 말은, '자비'를 실천해야 '덕'의 완전함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완전함에 도달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자비가 없는 사람은(무자비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그 사람을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평소에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성적으로 하더라도 자비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한 가지 더, 자비를 베풀 때에는 어떤 대가도 요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 군중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믿으라는 요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에 뭔가를 요구한다면, 자비가 아니라 거래가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사천 명을 먹이실 때의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

또 오천 명을 먹이실 때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기적의 절대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빵과 물고기가 없었어도 기적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꼭 빵이 몇 개 있어야만 기적을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니고, 그 능력은 '전능'이 아닙니다.

사천 명 군중에게 빵 일곱 개는, 또 오천 명 군중에게 빵 다섯 개는 사실상 빵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기적 이야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어도 당신의 능력으로만, 또 당신의 말씀으로만 기적을 행하십니다. 뭔가가 있어서 그것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4) 사실 '빵의 기적'은 일회성 기적입니다.

사람들의 굶주림을 영구적으로 없애 주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배가 고프니까 응급조치를 하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장애자를 고쳐 주신 경우에는 장애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 주신 일이지만,

'빵의 기적'은 한 끼 식사만 해결해 주신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적의 빵을 먹고 하느님 나라의 생명과 행복을 체험했습니다.

'배불리 먹었다.' 라는 말은(마르 8,8) 사람들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행복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체험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육체적인 배부름만 생각하는 사람은 계속 물질적인 빵만 찾겠지만...)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것을 제자들이 목격한 일도 사실은 일회성 기적입니다(마르 9,2).  잠깐 동안의 체험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믿음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용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은총들을 많이 체험합니다.

그 체험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나중에 들어가게 될 하느님 나라를 더 잘 믿게 되고,

그 나라를 더욱 희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신앙생활은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다리 같은 것입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      조재형신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좋은 말이죠? 예전에는 손으로 편지를 많이 썼잖아요? 저는 신학생 때, 나환자 마을에 봉사를 갔었습니다. 그곳의 한 여학생이 제게 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시작 글은 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이었습니다.

군대에 갔을 때도 편지를 곧잘 보내 주었고, 편지를 읽으면서 군 생활의 고단함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수도자가 되셔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지내고 있습니다. 추억은 그리움이고, 그리움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며칠 전 혜화동 성당 앞에서 우연히 한 학생을 만났습니다. 16년 전에 저는 적성 성당에 있었고 그 학생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이 된 그 친구를 저는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저를 알아보면서 가브리엘 신부님이시죠?’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얼굴은 몰라보았지만 이름을 이야기 하니 알겠더라고요?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새침했던 초등학생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내려오셔서 목장을 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현지입니다. 예쁜 이름만큼 예쁘게 자랐습니다.

 

주말입니다. 잠시 시간여행을 떠나보시면 어떨까요? 그래서 아름다웠던 추억을 기억의 책장에서 꺼내보시면 좋겠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부끄러움도, 사랑도, 이별도 모두 아름답게 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하나의 추억이 되기에 우리는 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하시는 질문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엇을 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했기에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질문을 하십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장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두운 곳에 있는지, 잘못된 곳에 있는지, 양심을 속이는 곳에 있는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도 있었습니다.

 "까마귀 디디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희고 흰 깃에 검은 때 무칠세라. 진실로 검은 때 묻히면 씻을 길이 업으리라." 맹자의 어머니도 아들을 위해서 3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습니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곳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이곳에서 어린 맹자는 글 읽는 놀이를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이사를 할 때, 제일 먼저 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성당이 가까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시는 곳도 성당에서 100미터도 안 되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눔입니다. 나눔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나눔은 나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이셨습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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