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 관념’ .(마르코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코 6,1-6)

“내가 나쁜 여자일까요? 내 남편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남편이 능력 있고 성실하며 자상한 성품이라고 칭찬하면서 그이를 잘 만났다고 해요.
그런데 가정에서는 조금도 아니거든요. 밖에서는 그렇게 친절하고 헌신적이며 인기가 좋은데 나와 아이들에게는 너무 아닌 거예요. 아이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도 모르고 살아요. 말도 하지 않은 채 핸드폰 붙들고 있거나 컴퓨터 게임만 하고 ……. 하숙생 같아요. 그러니 늘 가정불화가 생기는 거죠.”
본성상 남자는 가지지 못한 것을 얻어 내려는 외향성이 강한 반면, 여자는 가진 것을 지키려는 속성이 강하다고 한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건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인생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함께 사는 가족을 비롯해 친구, 이웃, 관심 있는 대상 등을 소중하게 여기고 서로 지지하는 것이 조화로운 삶의 기초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적 삶을 존중하기보다는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에 더 주목한다. 내 가족이나 이웃보다는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얼굴을 우상처럼 더 믿는다.
영웅은 보이지 않은 커튼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회성에 불과하다.
그래서 유명인사일수록 주변 사람들은 그의 성품에 대해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사람의 미래는 변화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살아온 삶은 이미 발자국으로 남아 있어 현재와 미래의 성향을 검증하는 거울이 된다.
함께 살아온 이에게는 자신의 인간성과 품성을 속이지 못한다. 위대한 예언자로 등장한 이가 자기 동네 청년이라면, 그의 됨됨이를 알고 있어 더욱 좋지, 기저귀 차던 시절의 눈으로 볼 이유가 무엇일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하늘로 부터 옵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 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판단력과 방향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세상에 지식인은 넘쳐 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국민을 행복하게 해야 할 정부와 여당이 정책혼선으로 오히려 국민이 정부를 걱정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서 정책이 입안되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하였을 때 서슴없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지도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고정 관념’ 탓입니다. 그분의 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들은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못 믿겠다는 말입니다. 기적의 소문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법사나 점쟁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람들의
편견’을 놀라워하십니다.
누구나 과거에 ‘매여 살면’ 그렇게 됩니다. 지난 일을 ‘지나간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렇게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힘든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자신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하는 삶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기
마련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은 퇴보합니다. 자연의 평범한 ‘진리’입니다.
신혼 초에는 남자가 말이 많고, 여자는 듣기만 합니다. 이삼 년이 지나면, 여자가 말이 많고, 남자는 듣는 쪽이 됩니다. 아이를 낳고 나면 가끔씩 싸우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떠드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내면’을 보게
됩니다.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은 영영 싹트지
않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었더라면 ‘주님의 기적’을
만났을 것입니다. 삶의 풍요로움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행복의 주님을 그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르 6,3)
오상선바오로신부(작은형제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놀랍니다.
"정말 놀랄만한 지혜구나.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은 것일까?
정말 대단하구나!"
그런데 이런 훌륭하고 좋은 일을 바라보며 놀라면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네요.
왜 지혜와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출신성분을 문제시하며 못마땅해 할까요?
예수님이 마을 유지의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도 어떤 사람의 선행이나 훌륭한 가르침을 접하고서도
그 사람에 대해 존경과 신망을 보내기보단 "알고보니 그 사람 이런저런 사람이더라"는
풍문 때문에 그 사람의 선행과 훌륭한 가르침마저도 못마땅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치 말고
그사람의 행동이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겠습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사람이라도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그 사람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과소평가 말아야겠지요.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해야지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기준이 변해서야 되겠습니까?
말씀 사랑을 전해주는 이가 신부님이든 수사님이든 평신도이든
그에 따라 말씀의 가치를 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제가 말씀사랑의 실명을 밝히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말씀 자체이지
그 말씀을 전해주는 이가 아님을 명심하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