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마르3,20-21)

2015. 1. 24. 오전 8:50:43

글자

2015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3,20-21)

 

 

                                                                             

미쳐야(狂) 미친다(及)

-제대로 미치야 성인(聖人)-

오늘 복음을 보면 마음이 밝아지고 기분이 좋습니다. 

딱 두절로 짧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복음중 오늘 복음보다 짧은 복음은 없을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일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역시 12년 전 여기 뉴튼수도원에 머물 때 일입니다.

"원장신부님, 강론이 아주 좋습니다.“

당시 원장신부님의 영어미사중 영어강론에 대한 어느 수도형제의 찬사였습니다.

"예, 어느 면이 좋았어요?“

반색하며 묻자, 

"아주 짧아서 좋았습니다.“

란 대답에, 언뜻 스치던 신부님의 실망스런 안색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좌우간 말이든 글이든 기도든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라면 짧고 순수한 것이 좋습니다. 

사실 마음이 간절하고 절실하면 저절로 짧아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 중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는 대목이 강렬합니다. 

'미쳤다'는 말마디가 좋은 묵상감입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습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입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누구나 무엇엔가 미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허무한 세상, 재미없는 세상, 사막같은 세상,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 이게 인간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 달인(達人), 장인(匠人), 도인(道人)이지만 

잘 못 미치면 폐인(廢人)이란 옛 강론 내용도 생각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주교 학자나 복음의 예수님 및 모든 성인(聖人)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분명 미친 사람들입니다. 

제 정신이 아닌 거지요. 

매일 새벽 3시마다 일어나 묵상하여 강론을 쓰는 저 역시 미쳤을 지도 모릅니다. 

직장 생활 8년만에 교직을 접고 제 나이 34세에 수도원에 들어올 때 

찬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반대했습니다. 

무모(無謀)하기는 맨땅에 헤딩하는 모습이었고 모두가 걱정했습니다. 

이 또한 세상 눈에는 미쳤음이 분명합니다.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 역시 당대 세인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미친 예수님께는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이자 집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정처없는 삶이셨지만 역설적으로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이요 집이었음을 뜻합니다. 

오늘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라는 대목의 집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활동은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당시 엘리트 종교인들인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과의 빈번한 충돌, 

상종 못 할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림 등 

예수님이 가족 들 눈에는 미쳤다고 볼 수 뿐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교사들도 마귀 두목에 사로잡혀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몰아 붙였을까요. 

다만 예수님의 충실한 추종자들만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존경했고 무한한 신뢰를 보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제대로 미친 성자(聖子), 하느님의 아드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쳐야 미칩니다.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합니다. 

곳곳에서 제대로 미친 성인같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는 기쁨에 살 맛나는 인생입니다. 

제대로 미쳤기에 마침내 하늘의 하느님에 까지 닿아 

하느님을 감동시겨 부활하신 후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가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니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대사제 예수님께서 집전하시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제대로 미쳐(狂) 하늘까지 이르신(及)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미사 선물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제대로 미친 성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사도16,14참조). 아멘.

 

 

오해

조명언 마태오신부

전라도 광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랍니다. 아주 유명한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특히 ‘날’이라면 청산유수라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집에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똑 소리 나는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시어머니가 될 할머니를 잘 알기에 며느리가 엄청나게 시집살이를 할 것으로 예상했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고 오히려 며느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며느리가 들어올 때 시어머니는 벼르고 별렀습니다. 처음에 꽉 잡지 않으면 큰 일 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부터 생트집을 잡고 모욕도 주면서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그런 시집살이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의연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친정에서 그런 것도 안 배워 왔느냐?”고 생트집을 잡으면, “저는 친정에서 배워 온다고 했어도 시집와서 어머니께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모르는 것은 자꾸 나무라시고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학 나왔다고 하느냐?”며 모욕을 주면, “요즘 대학 나왔다고 해봐야 옛날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못해요, 어머니!”라고 답변을 합니다.

매사에 이런 식이니 어떻게 갈등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자신을 한 없이 낮춘 며느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권위나 힘을 세상의 모든 것을 누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어쩌면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자신을 낮춘다는 것일 쉽겠습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마음의 상처도 보통 큰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된 낮춤을 통해서 진정한 승리인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척 바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쎄 음식을 들 시간조차 없었지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정신없이 사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주님의 뜨거운 사랑은 보지 않고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친척들조차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반대하려고 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낼 만도 합니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이런 사랑을 보여준 줄 아느냐? 너희 마음대로 살아봐!”라고 외치면서 벌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랑 실천을 멈추시지도 않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고,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고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그래서 삶 안에서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신은 우리 가슴에 머물 것이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운전 면허를 따지 못한 이유?

한 드라마에서 어떤 사람이 자동차 사고가 나 차 안에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운전면허를 따지 않을 것이고 자동차 운전도 안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의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돌아가셨니?"      "병원 침대에서"
 "너의 할머니는?"     "침대에서"
 "너의 아버지는?"     "침대에서..."
 "가족들이 모두 침대에서 돌아가셨구나. 내가 너라면 그렇게 위험한 침대에는 근처에도 안 가겠다.“

교통사고의 사망률이 적지는 않지만, 침대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이 더 많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침대에 눕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지는 않습니다. 미리 걱정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줏대 있는 삶을 살아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디나 반대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 죄인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     -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 받으시고 모함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소신, 주관이 고집이 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줏대’있는 삶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하십시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합니다.

 

 

 감곡 매괴성모 순례지성당에 5년동안 수고하셨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께서 청주  성모병원 행정부원장으로
엄은혁/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금천동성당으로 이동하십니다


 

 

 본당에서 1월 18일 두 신부님의 송별식이 있었으며 그동안 함께하였든 본당 신자분들과 교중미사후에 합동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댓글 1

  • 2015년 1월 24일 오후 6:21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엄민식살레시오 010-6379-3729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