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타 쿰!” >.(마르코 5,21-43)

2015. 2. 3. 오전 8:45:48

글자

 

 

<“탈리타 쿰!” >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마르코  5,21-43)

 

 달리다굼

 

믿음의 손            반영억신부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뚜껑을 따듯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 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를 차게 해서 아프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그를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회당장의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걱정거리가 없을 것 같지만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통하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아쉬울 것이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못할 고민이나 근심, 걱정 앞에서 회당장처럼 무릎을 꿇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취한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늘소리의 아침 편지 / 주님을 아프시게 한 것은 / 달리다굼  ♡ 달리다굼 - 전용대(외2) 

 하혈하는 여인 치유        조재형신부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이름을 가진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할까요? ‘바이러스, 박테리아, 세포, 식물, 동물등으로 구분을 할 수 있을까요? 과학자들은 생명은 탄수화물, 단백질, 핵산, 지질등으로 구성된다고 말을 합니다. 생명을 구성하는 70%는 물이라고도 말을 합니다.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려하고, 생식을 통해서 후손을 남기려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에서 생명의 시작은 30억 년 전쯤이라고 말을 합니다. ‘, , 바람, 은 지구 생명들이 살아가는 4가지 중요한 원소라고 합니다. 이들 원소들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정말 기적처럼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신앙인들은 생명의 시작은 또 다른 원소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이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사랑은 모든 우연을 필연처럼 만들기도 하고, 사랑은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이 사랑은 의미, 정신, 영혼, 마음, 문화, 역사, 예술이 가능하도록 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사랑이 넘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으시고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습니다. 단지 예수님께 오셔서 죽은 소녀를 살려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한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살면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욥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의지하며 걸어간다면 병이 나았던 여인처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던 소녀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5:21-43절 달리다굼

 

 

 

<믿음>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 5장 21절-43절,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죽었습니다.

하혈하던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진(마르 5,26)"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인데,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상태, 즉 사실상 죽은 것과 같은 상태, 야이로의 딸과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병을 앓았다는 것과(마르 5,25)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는 것을(마르 5,42)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열둘'은 두 사람 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나타내는 숫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적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혈하던 여자는 예수님의 옷을 만진 후에 병이 나았습니다. 소녀는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시자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 다 예수님과 '접촉'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직접 접촉해야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접촉'은 기적의 원인이 아니라 과정(방법)을 나타낼 뿐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직접 만나지 않아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마태 8,5-13).

그래서 항상 예수님의 뜻과 '말씀'이 중요한데, 이 이야기에서도 그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죽은 소녀에게는 "탈리타 쿰! -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어나라!(마르 5,4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과 '말씀'이 여자의 병을 고쳤고, 죽은 소녀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신 것은 여자의 병이 나은 뒤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병의 치유는 온전한 믿음을 주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옷을 만졌고,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아직은 부족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몸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은총을 주려고 하셨고, 여자가 병의 치유로만 만족하지 않고 구원을 받기를 바라셨습니다. 병의 치유도 은총이지만, 여자가 받은 진짜 은총은 '구원'입니다.

 

회당장의 딸의 경우에는 소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회당장의 믿음이 응답을 얻었습니다.

(그 소녀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 또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 소녀가 죽기 전이나 살아난 다음에 예수님을 믿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소녀의 아버지인 회당장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아버지의 믿음이 딸을 살렸다.", 또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을 살리셨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이 나를 살릴 수도 있고, 남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믿음'이 많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예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기 위해서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 천사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를 고쳐 주시고 구원하신 일과 죽은 소녀를 살리신 일은 예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말은 '내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는 말입니다.)

주도권과 결정권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바람과 다른 결정을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믿고 청했는데도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래도 실망하지 말고,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  이라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권능만 있고 자비는 없는 분이라면...? 그러면 아마도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아니라 무서운 독재자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자비는 있는데 권능이 없다면? 그러면 주님이 아니고, 종교와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자비도 있고 권능도 있는데 결정권이 없는 모습으로 우리가 청하는 대로 무조건 해 주셔야 하는 분이라면? 그런 경우에도 역시 '주님'이 아닌 분이 됩니다.

 

 

 

 믿음으로 함께 걷는 행복의 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위력으로 하혈을 하는 여인을 고쳐주시고,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켜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딸의 병을 고쳐 다시 살게 달라고 간청하는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을 받은 터였다(5,22-23).

그런데 하혈하던 여자가 군중에 섞여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이 여자는 열두 해 동안이나 병치레를 하면서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유대인들의 축제에도 참여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지내왔을 것이다.

하혈하는 여인은 불결하다고 여겨져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안 되는 병이자(레위 15,25)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수치스런 병으로 여겨졌다.


인간적으로 극도로 절망하던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려 병을 고치고 싶은 애절한 심정에서 유다인의 규정 위반이나 수치스러움을 괘념치 않고 예수께 매달렸다. 그 여자는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5,27-29).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처럼 철저히 소외된 그 여자를 “딸아”라고 애정어린 호칭으로 부르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5,34)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옷을 만진 많은 사람 중에 믿음으로 옷자락을 만진 그 여자만이 치유를 받았다(5,30-31). 그 여인의 절박하고 애절하게 간구하는 마음과 하느님의 위력을 지니신 예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전적인 의탁이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 치유를 일으켰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병을 고쳐주시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그토록 간곡히 청했던 회당장의 딸은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하고 말씀하신다(5,36).

그분은 절망과 슬픔에 사로잡힌 회당장에게 하느님의 권위로 격려하시고 그의 집으로 가셨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어린 딸의 싸늘한 주검을 앞에 두고 소란스러워 했고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였다(5,38). 그런데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소녀에게 “일어나라!”하고 말씀하시어 그 아이를 소생시키셨다(5,41-42). 이 소생사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소생이적을 일으켰던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훨씬 탁월한 분이심이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서 믿음으로 그녀가 하혈증을 고침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회당장도 믿음으로 죽었던 딸이 ‘곧바로 일어나 걸어 다니는’ 기적을 보게 된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인 듯하다. 사회 전반적으로 신뢰가 깨지고 권위가 실추되고, 인간성이 존중받지 못하고, 사회적 안전장치가 부실해지며, 가장 기본적인 삶을 살아가기에도 그야말로 ‘퍽퍽한’ 현실이다. 서민들의 삶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이 절망적이고 마음 아픈 현실에서 하느님만이 살길이요 우리 편임을 믿도록 하자! 이 어려운 상황을 버텨 나가도록 함께 해주신 분도 주님이요, 이 고통의 터널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도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뿐임을 명심하도록 하자! 아울러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며 탄식하던 이들의 “고통과 슬픔 중에 함께 하는 마음”과 주님을 향한 절박하고 애절한 믿음을 지니고,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내맡기며, 우리 함께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며 힘을 내도록 하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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