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코 6,53-56)

2015. 2. 9. 오전 8:04:12

글자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코  6,53-56)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사랑이 물상으로 드러난 것이 자연이고 내 목숨이다. 창조성과 건강성이 빛났으니 보시니 좋았다.

 그러나 악마의 부추김으로 형제를 죽이고 이기와 탐욕으로 갈라져 싸우며 질서를 벗어났으니 질병의 고통이 왔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의 사랑인 창조성이 왜곡되고 타락된 현상이다.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은 변함없어 고통에 빠진 생명을 구조한다. 지상에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손길이 그것이다.

 창조성을 일그러뜨린 악령을 추방하고 병마를 무상으로 치유하시는 행위가 사랑이고 구원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사상의 요약이다.
예수님의 구마(악령 추방)와 치유 현상은 지상에 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본디의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창조성과 건강성이 꽃피고 관철되어 완전하고 행복한 생명의 상태를 이른다. 내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본디 주어진 창조성이 악령의 포박과 질환 중에 있음을 뜻한다.

 그 상처를 예수님께 보이는 것이 회개이며 자비를 얻는 길이다.
그래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겐네사렛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와 치유를 간청했다.

멀리서 소리치며 간청하는 이, 몰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는 이,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을 동원해 부탁하는 이 …….

그 방법은 각자 삶의 궁리에 따른다. 그들마다 구원을 받았다. 치유의 길은 자신이 병자라는 점을 아는 것이 첫째이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둘째이며, 셋째는 상처를 보이고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병든 것조차 모른다는 데 있다.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라     반영억신부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을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 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 삼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으시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게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 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안에서 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이 내용에서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마르 5,27-29)."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병이 나은 일은 많은 군중 가운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고...

그런 기적 이야기들은 복음서 저자들의 '신앙의 증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이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루카 1,37)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 가운데에는 그런 기적을 부정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하거나, 심리적인 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를 바랐던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옷만 믿는 사람들로...

 1)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옷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안수를 해 주시면 좋고, 말씀을 해 주시면 더 좋고...

그들은 옷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병을 고치는 등의 기적만 바라고, 그 이상의 은총은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은 부족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써 병이 나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을 더 잘 따르게 된 사람이 몇 명은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이 나은 뒤에는 그냥 떠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도 아직은 많이 부족한 믿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병자가 좋은 예입니다. 그들 가운데 아홉 명은 몸의 병을 고치기만 하고 그냥 가버렸고, 한 명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한 명만 '구원'을 받았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루카 17,15-19).

가버린 아홉 명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자기들이 받을 수 있었던 더 큰 은총, 가장 좋은 은총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지는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기적'은 그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러 가지 은총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2) 예수님의 옷만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든지 아니든지 그런 것은 상관없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병을 고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옷이 병을 고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청하는 사람들의 병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믿음보다 처지를 먼저 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옷을 믿었더라도 병이 나은 뒤에는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이 나은 뒤에도 계속 예수님을 안 믿고 옷만 믿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옷을 믿는 것은 예수님 덕분에 병이 나았더라도 진짜 믿음이 아니고, 그냥 미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옷이든, 신으셨던 신발이든, 직접 사용하셨던 어떤 물건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런 것은 생명 없는 물건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물건들을 신처럼 섬긴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많은 성물들을 그런 식으로 잘못 사용한다면, 그것도 역시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옷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예수님)이 아닌 것을(사람을) 하느님(예수님)처럼 섬기는 일은 전부 다 우상숭배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리스트라에서 어떤 장애자를 고쳐 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본 군중이 바오로를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르나바를 헤르메스라고 부르면서 제물을 바치려고 했습니다(사도 14,13). 군중은 두 사도를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참 하느님을 섬기기를 바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하느님을 섬기기는커녕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우상으로 섬기려고 했으니... 바오로 사도는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요즘에도, 뛰어난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을 신이라고 부르는 일이 흔히 있는데, 결코 좋은 일은 아닙니다.)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는 예수님

 

   하느님과 예수님의 공통점.                           조세형신부

영어 ‘Truth'진리, 진실, 진상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치라고 생각됩니다. 진실은 어떤 사건의 숨은 의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진상은 사건이 발생한 구체적인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과학은 수와 법칙을 이용해서 벌어진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우리의 삶은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산업혁명은 과학이 있었기에 날개를 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시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하수 시설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과학은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으로 우주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으로 그 숨은 진실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문학과 철학은 인류가 문명과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도구입니다. 과학으로 종이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종이에 사랑, 만남, 이별, , 희망을 표현하는 것은 문학이라는 도구입니다. 과학으로 멋진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지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성입니다. ‘비유와 은유는 인간이 가진 특징입니다. 비유와 은유로 우리는 세상을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와 소설은 비유와 은유가 없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신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풀어주는 진리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고통은 왜 있는지, 죽음을 넘어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이 세상은 왜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어떻게라는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진화의 과정은 어떻게라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신학은 그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과학, 문학, 신학은 세상을 서로 틀리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들을 하고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광개토왕비, 진흥왕 순수비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명예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잘못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잘못들은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 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 갰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그림-5      [연중] 417. 주여 영광과 찬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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