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코 6,30-34)
주변에 사람이 많아 고달프다 반영억신부
사람은 때때로 쉬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 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시작 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한적한 곳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는 말은 당시의 사람들의 처지를 나타냅니다.
정치적으로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신앙생활의 자유를 누리기는 했지만
올바른 지도자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에 대사제와 많은 사제들이 있었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고,
사람들을 율법으로 억압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좋은 풀밭을 찾지 못해서 굶어죽거나,
이리에게 물려서 죽게 됩니다(요한 10,12).
또 도둑이나 강도들에게 잡혀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요한 10,10ㄱ).
생명을 주는 목자를 만나지 못하면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는 말이 실제로 목자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목자를 찾지 않고 방황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지금 복음 말씀에 나오는 군중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에게로 몰려든 사람들입니다(마르 6,33).
겉으로는 목자를 찾아서 온 사람들이고, 목자를 만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왜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고 표현했을까?
예수님과 만나기 전에는 목자 없는 양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목자가 있는 양들이 된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목자 없는 양들 같은 모습이었을까?
예수님은 그 군중을 만나기 전에도 만난 뒤에도 변함없이 '목자이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쪽에서는 목자를 찾아서 온 것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저 병이나 고치려고 온 사람들,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서 온 사람들,
아무 생각 없이 친구를 따라서 온 사람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물론 진정한 목자를 찾아서 예수님에게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여전히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떻든 '목자 없는 양들'은 '길 잃은 양들'입니다.
처음부터 목자가 없었던 양들이 아니라
목자를 떠난 양들, 또는 길을 잃어서 목자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양들입니다.
따라서 지금 복음 말씀의 표현만 보면 군중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든 상황이지만,
실제로는 목자가 없는 것 같은 모습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로 가신 상황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는 말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의 모습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아들은 집을 나가서 방탕하게 살 때에도,
또 돈이 떨어져서 굶주리게 되었을 때에도 부모가 없는 고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분명히 고향집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그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만일에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가서 이렇게 타일렀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너에게는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부모가 있다.
그런데도 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이렇게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가?"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야 합니다.
만일에 자녀답지 않게 산다면, 즉 신앙인답지 않게 산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 부모가 없는 고아처럼 사는 것이 됩니다.
목자가 있는데도 자기 자신을 목자 없는 양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고아' 라는 말에서 바로 생각나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8-19)."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십자가 죽음 뒤에 제자들은 고아 같은 모습이 되겠지만, 그 시간은 짧을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
다시는 고아 같은 처지로 버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는
"너희는 내가 주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인데,
"살아 있을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또 만나서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우리 쪽에서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안 되고,
항상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또 회개와 구원에 관해서 가르치셨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요한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목자와 양들'에 관한 말씀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목자를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 잃은 양'에서 '되찾은 양'으로 변화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신앙인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ㄴ)."
참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생명이 아닌 것을, 즉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고,
목자가 아닌 자들, 즉 현세적인 복만 말하는 자들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 (마르 6,31)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셨고
이제 제자들은
열심히 일하고나서
예수님께 돌아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질책도
하지 않으시고
"수고했다. 조용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하시네요.
오늘 마침 주말이네요.
한주간 동안
열심히 일하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지요?
"수고한 당신, 떠날 자격이 있다!"
어느 광고 카피 생각이 나네요.
주말에 그냥 집에 있지 말고
조용히 산책이나 가까운 곳
여행을 좀 다녀오세요.
귀찮다구요?
에이 나가봤자 돈만 쓴다구요?
예수님께서
수고한 여러분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나가서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를
한번 느껴보세요.
알았죠?

전화한번 해 보시면 어떨까요? 조재형신부
어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주무 부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6개월 전에 올림픽 체조 경기장 대관 신청을 했습니다. 3개월 전에 제단의 디자인을 구상하였습니다.
서품자들과 면담을 했습니다. 본당에서 보내온 서품자들의 서류를 검토했습니다. 현수막 제작, 초대장 발송, 평화신문과 가톨릭 신문에 홍보 신청, 주차증 발송, 성소 후원회 봉사자 모임, 성가대 섭외, 전례연습, 신학생들 모임, 운전기사 사도회 섭외, 의무지원팀 섭외 등을 했습니다.
물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걱정도 되었지만 하느님의 도움으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기꺼이 봉사를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단에 엎드려 기도하는 새 사제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 모두 순수한 마음으로 사제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맡겨진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살면서 몸과 마음에 많은 덧칠이 칠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쇄신, 정화, 속죄’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시기를 기도합니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좋고 서로 사랑하는 것 보다는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좋다.’
이제 곧 봄이 옵니다. 봄이 되면 많은 꽃들이 필 것입니다. 그런 꽃들 모두는 추운 겨울을 온 몸으로 견디어냈습니다. 눈의 무게에 가지들이 꺾이기도 했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꽃은 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우리의 삶도 그만큼 상처와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진 일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서 앞을 바라보는 용기입니다.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날입니다.’ 언젠가 들은 말입니다.
매일 주어지는 날들이 어떠신지요?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날인지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날들인지요? 물과 공기는 주변에 많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를 모르고 지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너무나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감사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 것이 인생입니다. 나누면서 살기에도 빠듯한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망과 분노, 시기와 질투, 미움과 좌절로 하루를 채우면서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악의 세력에게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가족끼리 왜이래!’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제 생이 3달 정도 남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늘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늘 곁에 있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은 하루에 한번 전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은 식구들이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말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한번 해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