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 (마르코. 7,24-30).

2015. 2. 12. 오전 8:21:50

글자

 [복음말씀]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오늘의 말씀초대]

하느님께서는 사람(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서 여자(하와)를 창조하셨다. 혼인은 인류 번성의 기초이고 독자가 아닌 공동체 삶의 기본 요소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 기능적 협력자이고 파트너임을 알게 한다(창세기. 2,18-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이교도 여인이 구마의 자비를 청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민족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셨다. 그러나 그 여인의 믿음이 민족을 뛰어넘는 것임을 보시고 딸을 마귀에게서 구해 주신다(마르코. 7,24-30).

[복음말씀]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오늘의 묵상>

짐승 가운데 인간과 가장 가까운 짐승이 개일 것입니다. 애완견을 키우는 가정에서는 개를 마치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가족의 일원이라고 할 만큼 애지중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물이지만, 사람에게 개 취급을 하거나 개로 비유하면 굉장히 큰 실례가 되거나 욕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여인에게 강아지 취급을 하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차별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자기 딸의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하는 그 여인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그 여인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합니다. 그 여인은 딸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면 주님 앞에서 강아지가 되든 무엇이 되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말한 상 아래 떨어진 ‘빵 부스러기’는 이제 그 여인의 온갖 자존심과 에고(ego)가 부서진 ‘부스러기’가 되었습니다. 자기 존재가 온전히 부서지고, 그 여인에게는 주님 앞에서 오로지 믿음과 갈망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온갖 자존심과 체면, 힘, 알량한 지식 등 이런 것들이 내 안에 피둥피둥 살아 있는 한,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내 존재의 주도권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 드릴 때,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

 

[모성애는 위대하다]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아!’ 마귀 들린 딸을 구해 주십사는 여인의 호소에 만민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시다니! 복음 나누기에서 “이건 예수님답지 않네요.” 하던 누군가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초점은 예수님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이다. ‘제발 딸만 구해 주세요. 개가 아니라 쥐라고 부른들 상관없어요!’ 모성애는 위대하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사랑이 있는 가정은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나자렛의 성가정만큼이나 완전한 공동체이다. 가정이 공동체 세계의 기초다. 그래서 교회는 가정을 완전에 가까운 공동체 모델로 삼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교우들을 형제자매라 부른다.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시기에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하느님과 한 몸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사상이자 공동체의 영성이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정은 대가족과 친지로 마을을 이루고, 인정과 도덕과 자치와 원로의 권위가 있는 소사회를 이룬다. 건강한 ‘본디의 삶’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의 자녀 사랑이 가정과 혈연을 넘어 이웃과 인류에게 미친다면 전쟁도 빈부의 양극화도 없는, 지상의 하느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농경 사회와 마을은 사라지고 대가족은 해체되었으며 가족마저 함께 밥도 먹지 못하는, 가정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해 4월에 성인의 반열에 오른 요한 23세 교황은 “사람은 함께 사는 데 의미가 있다.”고 가르치셨다. 병든 시대를 치유하여 사랑의 사회로 가는 길은 서로 함께 사는 데 있다. 대가족이 함께 사는 마을이 복구되어야 한다. 작은 삶과 마을의 회복 없이 가족애를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 미래가 없어 보인다.       

 

믿음만이 살길이다              반영억신부

 

어떤 생선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습니다. 결국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의 치유>                                               조재형신부

 

인간에게 질병을 주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아주 짧은 시간에 세대교체를 이룬다고 합니다. 세대교체를 이루는데 30년가량 걸리는 인간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전략은 남, 여의 성을 통한 생존이었다고 합니다.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23개씩의 염색체가 있는데 이들 염색체의 조합은 64조 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간은 1000억 명 정도 된다고 하니 앞으로도 유전적으로 같은 인간이 등장할 확률은 없다고 합니다. 남녀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생존을 위한 완벽한 조화이기도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것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완벽한 요새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가정이 모여서 마을을 만들고, 마을은 모여서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또 모여서 국가를 이루는 것입니다. 국가는 경제, 교육, 문화, 보건, 국방, 외교라는 강력한 백신을 만들어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내부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배우자를 주신 것은 이처럼 커다란 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이 상품처럼 거래된다면 가정에는 치명적인 독소가 될 것입니다. 가족들의 대화가 사라지고 가정이 하숙집처럼 변한다면 인류생존의 토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남자와 여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피부색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우리들의 시작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이해하여야 하며,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바로 그런 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인 여인의 청을 들었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을 보셨고,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딸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편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 볼 때가 있습니다. ‘피부색, 직업, 학력, 국적에 따른 편견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편견이 필요할 때가 있었습니다. 아직 우리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라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문화, 생각, 철학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병든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 (창세 2,18)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세요?
아님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나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좀 식상한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분명 혼자 살 수는 없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협력자로 짝을 만들어 주셨다네요.
옛날에는 대가족 안에서
함께 더불어 갈아가는 것이 정상이었는데
갈수록 함께 할 짝을 찾기가 힘들고
독신주의자들이 많아지니
참 걱정스럽습니다.

지같은 수도자도 독신이지만
사실 한 사람에게 매여 살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지요.

그런데 갈수록
같이 살아도 홀로이고
독신주의는 함께 삶이 부담스러워
선택하는 부정적인 면이겠지요.

혼자 살든
함께 살든
중요한 것은
나의 짝
나의 협력자
나의 도반이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이겠지요.

오늘 나의 짝
나의 협력자들에게
"함께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인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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