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6일 월요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 8,11-13)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과학주의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하느님의 기적을 보지 못한다. 영상 기술과 감각 산업들은 신화와 전설과 고전을 제거해 버렸고, 신앙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기적의 구호를 줄기차게 외친다. ‘경제 성장의 신화, 기적의 3D 기술, 공격용 신무기 개발 …….’ 세상은 신기술에 열광하지만 진정한 기적을 보지 못해 고독하다.
한 농부 시인이자 문화 평론가는 ‘삶이 기적’이라고 했다. 생명은 신기술로도 만들 수 없는 기적이다. 죽음을 앞둔 병자를 살려 내면 기적이라 하면서 왜 병원에도 가지 않고 건강한 것에 대해서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가? 하느님의 확실한 기적을 보면서도 어떤 징표를 보고 싶어 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과학은 인간성과 사회의 공동선을 발전시키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도 왜 인간은 변종되고 시대는 퇴행하는가?
왜 설 땅은 점점 좁아지고 물과 공기와 음식이 독극물에 오염되며, 햇빛은 줄어드는가? 인문 과학과 사회 과학은 발달하는데 왜 빈부의 양극화는 갈수록 극심해지고, 제국은 포악해지는가? 하느님 없는 과학의 모습이다.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삶에 감사하는 순간 하느님께서는 내 의식으로 현존하시며 축복하신다. 살아 있는 모든 이에게는 매 순간 기적을 체험하며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마을은 일하러 가기 전에 일과 기도를 바친다. “오늘도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일거리를 주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노동이 서로에게 평화와 기쁨의 선물이 되게 하시며, 수고와 정성마다 풍성한 결실을 주옵소서. 성체성사의 제물로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아멘.”

표징을 요구하지마라 반영억신부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은총도 그 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그렇지만 자주 접하게 되면 둔감해지기 마련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 맞는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 진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당신의 권능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이 지니셨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창세4,3-8)
형제 우애(兄弟友愛) 조재형신부
오늘 제1독서는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인류의 첫 형제가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사랑하며,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역사는 담담하게 이야기 합니다. 조선의 개국 당시에 ‘왕자의 난’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권력 때문에 사랑해야 할 형제들이 서로 싸우고, 죽였습니다.
1950년에 있었던 ‘한국전쟁’은 사상과 이념 때문에 사랑하는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던 비극의 역사입니다. 끊임없이 분쟁이 벌어지는 중동의 전쟁은 역시 형제들의 다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인데 지구촌에는 가난,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류의 사망 원인은 자연재해와 질병 그리고 다른 동물의 공격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형제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국어책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형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은 이제 막 장가를 간 동생을 위해서 자신의 논에서 소출한 벼를 동생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동생은 자녀들이 많은 형을 위해서 자신의 논에서 소출한 벼를 형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달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에 형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진한 우정을 이야기 합니다.
1997년 우리나라는 IMF라는 높은 파도를 스나미처럼 맞이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형님은 음식점을 크게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했습니다. 장사는 잘 되지 않고, 이자는 높아졌고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형님에 대한 원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부모님을 제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의정부에 전세를 얻었고, 10년 전에는 작은 빌라를 매입하였습니다. 지금은 대출금도 모두 갚았고, 홀로 되신 어머님께 매달 용돈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가족들이 서로 아껴주며 살아가는 형님과 형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벌써 15년이 지난 일입니다. 돌아보면 그런 일도 다 감사할 뿐입니다. 덕분에 제가 효도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고, 존중하며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번 설에는 페루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들을 만나러 갑니다. 묵상 글은 26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잘 다녀 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느님도 편애를 하실까?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제 아담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고, 그제 하느님께 지은 죄에 대해서 얘기하는 창세기는 오늘 인간에게 지은 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기회에 여러 번 얘기한 것이지만 사실 원죄는 인간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은 겁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원죄의 탓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근원적으로 하느님께 있습니다.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죄를 지었지만 그런데 그 이유가 하느님의 편애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제임스 딘 주연의 에덴의 동쪽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저도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바로 카인과 아벨의 얘기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이며 에덴의 동쪽이란 제목은 아담이 죄를 짓고 동산 동쪽으로 쫓겨나고 카인도 아벨을 죽이고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게 된 데서 따온 것이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형만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자 비뚤어진 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아버지가 좋아할 일을 하지만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되자 자기 형을 파멸시킴으로써 가족이 결과적으로 다 잘못되게 됩니다.
인간이란 영원히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고, 사람에 따라 그리고 성장 과정에 따라 연인, 친구, 스승 등 받고 싶은 사랑이 달라지긴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부모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편애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저의 경우도 저희 할머니가 저보다 형을 더 사랑하는 것 때문에 할머니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꼈고 나도 같은 사랑을 받고 싶어 했으며 형에 대해서는 형이니까 더 사랑 받아야 한다 생각하고 존경하면서도 나이 차이가 나는 형인데도 사랑을 놓고 경쟁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이 편애하듯 편애하고 차별하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음에도 하느님께서 차별치 않고 편애치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합니다. 인간 사랑에 대한 의심이 하느님 사랑에 대해 의심케 하는 것이고, 인간의 편애와 차별을 하느님께 투사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왜 인간은 느끼지 못하고 인간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걸까요? 인간은 사랑이 성숙하지 못할 때, 그리고 성숙하지 못할수록 나만 사랑하기를 바라고 나를 더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만 사랑할 때 사랑한다고 느끼고 나를 더 사랑해야만 사랑한다고 느끼며, 그러니 모두를 사랑하면 사랑을 못 느끼고 똑같이 사랑해도 사랑을 못 느낍니다.나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나의 햇빛이고 나의 감나무에 걸린 달이 나의 달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공동소유는 안 되고 뭐든 내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고 하느님의 사랑도 나만의 사랑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나무인 동산의 선악과나무를 나의 나무로 따먹으려한 인간은 하느님 사랑도 보편적인 사랑으론 만족 못하고 내 사랑이길 바랍니다. 이 소유적 사랑을 넘어서야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하느님 사랑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 8,12) 오상선신부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신이 어디 있어? 종교는 다 가짜야!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이용해서 신을 팔아먹는 장사꾼에 불과해!
정말 신이 있다면 표징을 보여줘 봐!
그라믄 한번 믿어볼까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 온통 하느님의 표징들인데...
내가 살아 숨쉬는 것조차 기적이요,
내가 사랑하며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요.
이런 수많은 기적들과 표징들을 못 본다면
그 어떤 거창한 표징이 내려도 절대 믿지 못할 테니까
그런 사람은 어떤 표징도 못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 또 어떤 구원의 표징을 보게 될까요?
또 어떤 하느님의 선물들을 보고 감사드리게 될까요?
오늘 하루를 살면서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의 미소를 만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