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른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으리라.”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는 날이 안식일이라고 가르친다(제1독서이사야 58,9ㄷ-14).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복음루카 5,27-32).
[묵상]
어떤 일에서나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태도와 ‘상대방의 심정’으로 이해하는 태도이다. 좀 어려운 말로는, ‘존재론적-관계론적 세계관’이라 하는데, 관계론적 세계관은 ‘공동체 영성’이기도 하다. 자기중심의 태도는 너와 나의 경계를 가른다. 무엇보다 나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로 판단하며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다. 타인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동정심이나 배려도 없다. 공부 못하고, 가난하고, 감옥에 가는 것도 모두 그 자신의 문제로만 규정한다.
그러나 공동체 영성을 가진 이는 세상의 사건들이 자신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사회적 책임감을 느낀다. 슬퍼하는 마음을 공유하면서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인정의 손길을 내민다. 강도를 만난 이웃에게 참된 이웃이 된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 참조)처럼 말이다.
어느 시인은 ‘몸의 중심은 뇌나 심장이 아니라 아픈 곳’이라고 했다. 아픈 곳에 손이 가고 기도가 있다. ‘공동체에는 아픈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 이유다.
세리와 병자와 죄인들을 마주한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들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시며 치유를 베푸셨다. 너와 나의 구분뿐 아니라 죄인과 선인의 경계가 없어졌으므로, 그냥 병자에게는 의사가, 고독한 이에게는 친구가 되신다. 그래서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서로 한 몸인 공동체를 만드시니, 세리들이나 죄인들도 예수님을 영접한다.
경계가 없으면 존재하는 만물이 공동체다. 서로를 한 몸으로 고백하는 공동체 영성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약이고 신학의 핵심이다.
사랑받는 죄인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의인인체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인정하고 부족함에 대해 채워주기를 희망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 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셨으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교부 사르마타스는 말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31,34).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요한12,47)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시기 바랍니다(성 베르나르도).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1,9)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모세, 왕 중의 왕이라고 했던 다윗,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주님의 으뜸제자인 베드로에 이르기까지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인정하였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으며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자비로 주어지는 행복을 차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레위가 베푼 잔치에 세리들과 함께 참석하시자,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신 일과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일은 따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세리들과 어울리신 것은 그들이 죄인들이었기 때문이고, 레위를 제자(사도)로 부르신 것은 그가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 부르신 것과 제자로 부르신 것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그를 신앙인으로 부르신 일이 먼저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부르시는 것은 죄 속에 있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당신의 구원 사업을 함께 할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라는 말씀은 열두 사도와 사도급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도급 제자가 아니라 신앙인으로 부르실 때에는 "나를 믿어라." 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비난 속에는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일에 대한 비난도 들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바리사이들은 "제자로 삼을 만한 사람이 그렇게 없어서 세리를 제자로 삼는가?" 라고 비난했거나 비웃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교회의 어떤 직책을 맡은 사람의 직업이나 출신만 보고 그를 함부로 판단한다면, 우리도 바리사이들 같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바리사이들의 비난은 '먹고 마시는' 행위만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죄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는 일에 대한 비난입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아예 세리들과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죄인들과 접촉하면 자기들도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의 비난에는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예수라는 자도 죄인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병든 이들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예수님 말씀의 뜻은 단순합니다. 의사가 병든 이를 치료하려면 당연히 그를 만나야 합니다. 죄인을 구원하려면 당연히 그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의 초대를 받아들여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만나신 것은 그들이 의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만나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는 "지금 누가 누구에게 죄인이라고 말하는가?",
또는 "세리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너희 바리사이들은 의인인가?" 라는 질문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우리는 의인이다." 라고 스스로 말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위선자들이다." 라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르면서 억압하고 배척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가 되고, 사랑을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은 하느님(예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지 말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깨달으라고 가르치셨는데(루카 6,41-42), 우리 입장에서는 "누구의 눈 속에 티가 있고, 누구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어느 쪽 죄가 더 크고 많은가?" 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죄가 있지만,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덜하다." 같은 말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말입니다.남을 판단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비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죄를 먼저 생각하고,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동체 전체의 죄'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경우에도 "제 탓입니다." 라는 고백을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 탓'이라고 고백할 때 시작됩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 모두의 죄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공동체 전체의 죄는 공동체 전체가 함께 회개해야 합니다.
또 한 자리에 모여서 함께 회개하는 경우에는 '우리 탓'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도 일차적으로(기본적으로)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고, 보속도 '내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회개해야지 왜 '내가' 회개해야 하는가?" 같은 말은회개하기를 거부하는 태도가 될 뿐입니다. (공동체 전체의 죄에 자기는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연대 책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