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3.11ㄴ-32)

2015. 3. 7. 오전 7: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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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3.11ㄴ-32)

미카 예언자는 버려진 양 떼처럼 흩어진 이스라엘을 보살펴 주시기를 하느님께 간청한다. 특히 예전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자애를 베푸시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신 일들을 기억해 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미카 7,14-15.18-20).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알려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운 아버지가 집을 떠났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듯이 죄인이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돌아오는 죄인을 기쁘게 맞아 주신다(루카 15,1-3.11ㄴ-32 ).     

 

시편 103(102),1-2.3-4.9-10.11-12(◎ 8ㄱ)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루카 15, 11ㄴ-32 ).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오늘의 복음을 읽을 때 많은 이가 큰아들에게 공감합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말썽 많은 작은아들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충실하게 살아온 큰아들이 더 칭찬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고 아버지의 것이 모두 그의 것이었습니다. 분명 큰아들은 좋은 몫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살면 좋겠지요. 사람들에게나 하느님에게나 미안하고 부끄러울 일 없이 당당하게 한평생 살고 싶은 것이 큰아들의 마음일 것이고,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은 없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큰아들이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5,19) 하고 말하는 작은아들을, 아버지가 아들로 받아 준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작은아들은 비로소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또한 작은아들은, 자기가 자격이 있어서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큰아들은 아버지의 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가 모든 것을 잘해서 아들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큰아들은 자기와 동생을 비교하면서 잘못을 저지르고 돌아온 동생이 저렇게 환대받는다면, 그동안 철저하게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노고가 인정은커녕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투덜거립니다. 이처럼 큰아들의 시각은 온통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본다면, 더욱이 바로 그 아버지의 아들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진정 알았더라면, 집 나갔던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큰아들은 자기가 아버지를 위해 수고한 것만 생각하였고, 아버지가 베푸는 사랑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루카 15,2-3). 그래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느님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것을 비판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이 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하는 말과 같습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30)."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을 처벌해야 하고, 죄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처벌해야 하고, 가족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 속에서 살던 세리들의 과거의 모습만 생각했고, 회개한 현재의 모습은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큰아들은 방탕하게 살던 동생의 과거의 모습만 생각했고,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현재의 모습은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 때문에 슬퍼하시는 하느님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고,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 때문에 슬퍼하는 아버지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고, 작은아들이 돌아와서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함부로 판단했고, 멸시했습니다. 큰아들은 자기는 효도를 다 했다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의 죄만 비판했고, 동생을 멸시했습니다. 

대부분의 세리들이 죄 속에서 살았던 죄인들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작은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집을 떠나서 방탕하게 살았으니 그가 죄인이라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세리들은 더 이상 죄인 취급을 받으면 안 됩니다. 작은아들도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더 이상 죄인 취급을 받으면 안 됩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을 죄인 취급하면서 배척한다면, 그 사람을 받아주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그는 자기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그 바리사이의 기도는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루카 15,29)." 그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다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정말로 죄가 없었을까? 또 큰아들은 정말로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었을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죄 가운데 대표적인 죄는 '위선'입니다. 그들의 선은 겉으로 보기에만 선이고, 사실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속으로는 세리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큰아들도 위선자입니다. 비유의 내용에는 그가 잘못한 일이 구체적으로 안 나오지만, 그가 한 말을 보면 그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종으로서 했을 뿐이고, 아들로서 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착한 아들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작은아들과 다를 것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라는 아버지의 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말은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까지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나와 너는 하나다." 라는 말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남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따라서 큰아들과 작은아들도 남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작은아들을 잃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일부를 잃었고,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잃었던 자신의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아버지의 말은(루카 15,32)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 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큰아들은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사실 바리사이들(율법학자들)과 세리들을 구분하는 일,큰아들과 작은아들을 구분하는 일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고, 하느님 앞에서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들이고,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큰아들도 회개해야 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와서 기뻐하고 있지만, 큰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여전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숨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입니다.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 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 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집의 처지가 밖에 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구지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 아들이 배고픔에 지쳐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을 때는 집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연습한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하시며 먼저 받아주셨을 때일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 카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큰 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 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목을 뻣뻣이 하고 있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루카 15,31)

여러분은 늘 성실하고 착한 아들딸로 열심히 살아오셨죠?
그런데 옛날에 잘 먹고놀던 약삭빠른 친구가
지금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잘 살고 있는 이도 있지요?
그런 친구를 보면
괜히 내가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 온 것이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나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계명도 잘 지키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안 그런 신자가
나보다 더 인정받고 더 잘 사는 걸 보면
괜시리 억울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들에겐 그런 것으로나마 위안을 받게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좋은 것 전부가 축복으로 이미 주어져 있답니다.
그 축복과 현재의 위로의 선물을 바꾸고 싶으세요?

자, 오늘은 나보다 더 성실하고 착하지 않으면서도
현세의 많은 축복을 누리는 듯한 이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늘 나와 함께 계시며
나에게 모든 좋은 것을 이미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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