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베엘제불> (루카복음 1,14-23).

2015. 3. 12. 오전 7:57:23

글자

 

 <사순 제3주간 목요일>(2015. 3. 12. 목)(루카 11,14-23)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살아왔다고 하시면서, 당신이 예언자를 이스라엘에 보내시더라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이스라엘을 고발해야 한다(제1독서예레미야 7,23-28).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에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신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선언하신다. 이제는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고 그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루카복음 1,14-23).     

 s, s, s

시편 95(94),1-2.6-7ㄱㄴㄷ.7ㄹ-9(◎ 7ㄹ과 8ㄴ)
◎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세.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
○ 어서 와 엎드려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로세. ◎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화답송 후렴).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왔고 오늘도 변함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까지 인간의 무딘 마음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날마다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에도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그런 일들을 하신다고 악담을 퍼붓습니다.
과연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무디고 완고하게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함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믿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한 가지 실마리가 나타나는 듯합니다. “너희의 아들들”이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경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어떤 힘의 도움을 받아 마귀를 쫓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마귀를 지배하는 것은 다른 어떤 힘이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목소리에 동시에 귀를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이 하느님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고 있을 때 하느님의 목소리는 들릴 수 없습니다. 이집트 탈출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가 어려웠던 것은 그동안 무수한 경쟁자들이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딘 마음을 일깨워, 오늘 내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베엘제불>      송영진 모세 신부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루카 11,23)

이 말씀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예수님을 비방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은, "내가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마귀 편에 선 자들이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모두 적대시하시는 말씀은 아니고, 능동적인 신앙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을 안 믿는 자들이 실제로 마귀들 편에 선 것도 아닙니다. 그들도 마귀들을 인간의 '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내가 주는 구원을 안 받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등지고 마귀들에게 가는 것과 같다."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안 들어간다면, 갈 곳은 마귀들이 있는 곳뿐입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마귀들을 믿는 것이 아닌데도 예수님을 안 믿음으로써 마귀들을 믿는 것 같은 결과가 됩니다.

또 이 말씀은, 중간이나 중립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과 싸우실 때, 그 싸움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사실상 마귀들 편에 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사람들이 자기들 편을 안 들어도 최소한 중립이라도 지키기를 바라는 존재입니다. 마귀들이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善)이고, 마귀는 악(惡)입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사실상 악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마귀는 미움과 불신을 부추기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사랑과 미움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다."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미워하는 것도 아닌 상태는 사실상 사랑을 거부하고 미움을 선택한 것과 같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을 외면하는 것과 그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사실상 같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말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바로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다." 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의 경우, 그들은 강도당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선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악한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생각하면,그들이 선한 일을 안 한 것은 곧 악한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이 죄가 됩니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에 그 두 사람이 강도짓을 하는 현장을 보았다면, 그런데 그냥 외면하고 지나갔다면, 그 두 사람은 강도들의 공범과 같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독재자 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독재자들은 그렇게 방관만 하는 국민을 좋아합니다. 그래야 쉽게 독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꼭 이렇게 이분법적으로만 생각해야 하는가?" 라고 불평할 사람이 있겠지만, 이것은 이분법적인 흑백논리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원래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안 들어갔든지 못 들어갔든지 간에 그 나라의 '안'에 있지 않다면 모두 '밖'에 있는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 나라를 향해서 가는 일 자체를 거부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그 나라까지 가기 위한 노력은 하기 싫어서 출발조차 안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출발하긴 하지만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나라 문 앞까지 가긴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자만심에 빠져서 한눈을 팔다가 그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의 '밖'에 남아 있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서 목적지에 잘 도착한 사람들만 하느님 나라의 '안'에 있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니까 정상참작을 해 주시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것을 우리 쪽에서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은 "깨어 있어라." 라는 가르침과 비슷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자고 있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 즉 반쯤 졸고 있는 상태는? 완전히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니 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텐데, 하느님의 심판은 완벽하게 공정해서 심판 때에 억울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흑백논리만 내세우는 무자비하신 분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려면 우리 쪽에서 먼저 최선을 다 해서 예수님 편에 서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중간은 없다      반영억신부

 

‘두 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주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4,15-16).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 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구애 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 장군식으로 지내다가 성경말씀이 가슴깊이 다가왔는데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에 차있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십시오’(시편95,1-2). 앞날을 살아있는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루카 11,26)

세상 사람들은 편가르기를 좋아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고
경상도냐 전라도냐 남자냐 여자냐
사용자냐 노동자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종교가 뭐냐...

니편내편으로 갈라 어디에 속해야만 마음이 안정되나 봅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는 사람을 회개자냐 아니냐로만 구분하였었지요?

우리는

하느님편이냐 마귀편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네요.
사도 바오로도
제발 아폴로파니 바오로파니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요.

여러분은 누구편입니까?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편이고 복음편일 따름입니다.
새누리당도 아니고 새민련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벙어리 냉가슴 

 

 

나는 정말 예수님 편일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왜일까?

그분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었다.

언제부터일까?

내가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과 중상모략을 일삼았을 때이다.

 

나의 입은 지금 어떤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이끌고 있는가?

아니면 멀리 떠나게 하는가?

부끄럽다.

이제부터라도 벙어리가 되어야겠다.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고,

늘 사랑만을 말하여 예수님을 선포해야겠다.

오로지 믿는 마음으로 듣고,

늘 순수하게 들어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야겠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떠한 악의 세력도 나에게 달려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나는 누구의 편인가?

나는 예수님 편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입과 귀에 금방울을 달아야겠다.

 

주님,

당신께서 늘 그러하셨듯이 저 또한 당신처럼 말하게 하소서.

진실을 말 못하는 사회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시고,

거짓을 말하는 이의 소리를 가려들을 수 있게 하소서.

 

 

 진리란 무엇일까요?         조재형 신부

 

진리란 무엇일까요? 참된 이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이론 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천일 수 있습니다. 흔히들 진리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이며, 절대적이라고 정의합니다.

인류는 자연에서, 신화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진리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 , , , 바람은 이제 더 이상 인간에게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자연 현상일 뿐입니다. ‘신화는 먼 옛날 두려움에 떨던 인간이 의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알 속에서 영웅이 태어나지도 않고, 산 속 깊은 곳에 신적인 존재가 있지도 않습니다. 생명은 유전자의 진화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쌓아놓은 바벨탑이 진리인 것 같았습니다. 수학, 과학, 철학은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성에 의지했던 인류는 2번의 세계 대전을 경험했고, 지금도 세상은 많은 갈등과 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진리인 것처럼 추구하는 재물은 환경의 파괴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방치하게 만듭니다. 재물은 블랙홀처럼 인간의 양심, 나눔, 희생, 헌신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물 때문에 이웃을 속이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재물은 명예라는 옷을 입으려하고, 재물은 권력을 벗 삼아 견고한 성을 쌓아놓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마치 그곳이 낙원인 것처럼 생각하며 불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살고 있습니다.

 

진리란 무엇일까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내려놓으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리하고 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자연, 신화, 이성의 옷을 굳이 입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진리는 언제나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했던 하느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이천년 전에 사람들은 그런 진리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재물이라는 베엘제불을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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