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간 월요일] 나아만의 기적 (루카 4,24ㄴ-30).
아람 장수 나아만은 나병 환자였다. 그가 사마리아에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엘리사 예언자는 그의 병을 고쳐 준다. 이를 통하여 나아만은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열왕하 5,1-15ㄷ).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가 이방인인 사렙타 과부에게 파견되었고 엘리사 예언자가 나아만에게 파견되었음을 말씀하시면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고향 사람들이 예언자를 거부하기 때문에 복음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전해진다. (루카 4,24ㄴ-30).
시편 42(41),2.3; 43(42),3.4(◎ 42〔41〕,3)
◎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비파 타며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24ㄴ-30).
루카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고 선포함으로써 그분의 공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런 다음 오늘 복음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는 오랜 기간 나자렛 사람들을 설득하려 애쓰신 끝에 실패와 좌절을 겪으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줄을 예감하신 것 같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4,24). 엘리야를 맞아들인 이는 사렙타 과부였고, 엘리사에게 도움을 청한 이는 아람 장수 나아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보시고도 예수님께서는 전혀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벼랑에서 떨어뜨리려 할 때까지도 그분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4,30) 떠나가십니다. 쫓겨 가시거나 피해 가시는 것이 아닌, 흔들림 없이 다른 이들을 향해 가시는 발걸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경고는 우리를 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도 그들과 같은 위험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상상한 이상적인 예수님께서 내 생각과 달리 행동하실 때, 그분을 가차 없이 배척합니다. 내가 그린 예수님과 복음의 예수님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나자렛에서 놀라지도 않으시면서 담담히 떠나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을 보면, 그런 일이 생각보다 흔한 것 같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자 그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렙타의 과부'의 일과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일을 말씀하십니다(루카 4,25-27).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뜻이 아니라, 예언자를 환영하지 않는 고향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언자를 고향에서 더욱 환영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환영하지 않는가?"이고, 이 말은 "너희가 하느님을 믿고 있으니 당연히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의 일과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일을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자만심을 버리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특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라는 뜻이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욕감을 느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4,28-29).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신앙인이라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1-22)."
'본래의 가지들'은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특권을 박탈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특권을 잃은 것처럼 그대도 그대가 받은 은총을 잃게 될 것이다."입니다.
하느님께서 준엄하시다는 말은 스스로 떨어져 나간 자들에 대한 심판을 뜻하고, 하느님께서 인자하시다는 말은 하느님은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는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고 스스로 떨어져 나간다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심판을 면제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안 믿은 사람들은 그들대로 심판을 받겠지만, 신앙인들은 신앙인들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은 '참 포도나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설한 것과 같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6)."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먼저 가지들을 잘라내시지는 않습니다. '잘린 가지'는 예수님께서 잘라내신 가지가 아니라 스스로 떨어져 나간 가지이고, 스스로 말라버린 가지입니다. 결국 심판과 처벌은 그 자신이 자초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옛날 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특권의식을 비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를 반성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실 때(루카 13,24) 이런 경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6-27)."
이 말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희는 날마다 미사 참례를 했고, 영성체를 했고,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누구인지 모른다. 물러가라.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한 자들아!' 하고 말할 것이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초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고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참석을 해야 하고, 참석하려면 혼인 예복을 잘 입어야 합니다(마태 22,12). 즉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반영억 신부
현대를 지식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병 중에 가장 못된 병은 '자페증'이랍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병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으면 다른 사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굴곡 되게 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갈 길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하지 않고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 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가르침 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 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를 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조재형 신부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감사드리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밀밭에 가라지가 자라듯이 우리의 몸은 때로 병이 들기도 합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좌절과 고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 보다는 슬픔과 원망이 먼저 찾아오기도 합니다.
제 마음이 흔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고, 누군가를 원망하게 됩니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건강도, 행복도, 오래 사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내려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가끔씩 환자들에게 하는 처방이 있습니다. 몸은 별 이상이 없는데 심리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주고 영양제나 비타민 같은 약을 준다고 합니다. 물론 그 약은 영양제나 비타민이 아니라, 지금 아픈 병에 필요한 약이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가짜 약을 먹은 후에 아팠던 몸이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환자들은 의사를 믿고,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이 몸에 좋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고 합니다. 공자께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람을 믿기도 어렵지만 한번 믿었던 사람을 의심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 서로 믿어서 부부가 되었지만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부부는 남남보다 더욱 어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의심의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면 남편이 회사에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면 남편이 늦게 퇴근을 해도, 술을 마셔도 든든하게 보입니다. 같은 남편의 하루이지만 의심의 눈으로 보는지, 믿음의 눈으로 보는지에 따라서 남편은 든든하게 보이기도 하고, 남편은 못된 남자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늘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들에게도 단 한 가지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아프고 병든 사람이 ‘믿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평생 괴롭혀 오던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요르단 강에 몸을 담갔기 때문입니다. 나아만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르단 강의 물은 시리아에 있던 다마스쿠스 강보다 수질이 더 좋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에는 의심하고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병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믿음을 가졌고 요르단 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나아만은 나병이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강물이 나아만을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치유된 것입니다.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나병에 걸린 장수 나아만은 온갖 용하다는 의사를 찾았지만
병이 차도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엘리사 예언자는
그에게 예도 표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고 가라고만 합니다.
나아만은 자기같은 인물님을 안 알아주고
아무나처럼 취급하는 것에 단단히 화가 나서
병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그냥 돌아가려 합니다.
그나마 종이 뜯어 말리고 겨우 설득하여 그대로하여 치유의 기적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받고싶다면
참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니보다 지위가 높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학벌이 높다는 의식이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기 위해 대리자로 세운 사람에게
참으로 겸손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겸손되이 의사의 처방에 따라야만 치유의 축복을 얻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고자 합니다.
직접하시지 않고
누군가를 시켜서 나에게 뭔가를 요청하실 겁니다.
그게 하찮아보이는 것이라할지라도
그가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하더라도 겸손, 또 겸손합시다.
하느님의 명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래야 은혜와 축복이 내립니다.
그래야 치유와 기적이 내립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2열왕 5, 10) 시골신부(촌놈)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함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무엇을 바라는 지를 아시고도 이러한 말씀으로 그들에게 화를 불러 낸다.
그냥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 받지 못함"(루카 4, 24)을 전해 주기 위함인가?
그러나 독서의 1열왕기의 말씀을 통해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나아만의 이야기를 전함에서 예언자 엘리사는 나병이 걸린 나아만에세 커다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한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2열왕 5, 10)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나아만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 11)고 말한다.
표징을 요구하는 유다인들과 특별함을 기대하는 나아만
신앙이란 바로 특별한 장소나 시간을 통해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시간 속에서, 평범한 일상 안에서 되어지는 것,
다시 말하면 일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들을 수 있음이다.
오늘 이라는 시간은 바로 우리게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됨을 나아만을 통해 바라보고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도록 해 본다.
오늘을 주신 하느님, 오늘의 시간 속에서 함께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통해 나의 신앙이 더욱 굳건해 지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나의 하루살이르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