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계명 (마르 12,28ㄴ-34)

2015. 3. 13. 오전 8:3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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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금요일>(가장 큰 계명)(마르 12,28ㄴ-34)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기도를 가르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기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시고 그들을 사랑해 주시기 때문이다(제1독서 호세아 14,2-10).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응답하시면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신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를 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마르코복음 12,28ㄴ-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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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1(80),6ㄷ-8ㄱ.8ㄴㄷ-9.10-11ㄱㄴ.14와 17(◎ 11ㄱ과 9ㄴ 참조)
◎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 전에는 모르던 말씀을 나는 들었네.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풀어 주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내려 주었다. 곤경 속에서 부르짖자 나는 너를 구하였다.” ◎
○ 천둥 치는 구름 속에서 너에게 대답하였으며, 므리바의 샘에서 너를 시험하였다. 들어라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타이른다. 이스라엘아, 부디 내 말을 들어라. ◎
○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 너의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렸다. ◎
○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코 12,28ㄴ-34).     

 

호세 1―3장의 호세아의 혼인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호세아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간절히 부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호세아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갔던 아내를 다시 데려와 한결같이 사랑해 주었듯이, 하느님은 부르실수록 당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이스라엘을 한없이 품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호세아서의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이스라엘의 회개는, 더 이상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하느님의 호의를 얻으려 하지 않거나 아시리아의 군사 원조나 군마와 같은 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고 오직 고아와 같은 이스라엘을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단락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시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회개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께 돌아갔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에 앞서 하느님께서 먼저 그들이 우상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아도 될 만큼 그렇게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셨음이 강조됩니다.

‘마른땅’으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스스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슬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도저히 싹을 틔울 것 같지 않던 이스라엘이 나리꽃처럼 피어납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가장 큰 계명>      송영진 모세 신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많은 계명들과 율법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입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싶어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가장 중요한 계명'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계명의 '근본정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답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다른 것은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계명과 율법이 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라는 말은 "계명들 가운데에서 어떤 것을 가장 작다고 하면서 무시하거나 어긴다면"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계명들 가운데 어떤 것도 싫다고 해서 소홀히 여기거나 무시하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즉 모든 계명이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더욱 간단하게 줄이면, "계명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다."입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내려주신 것들이고,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킬 때에는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만 내세우면서, 또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 계명 실천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계명 실천으로 그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라는 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라는 뜻입니다. 원래 사랑이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모두'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도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공동번역)." 사랑한다면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해야 합니다. 

또 이 말씀은 사랑을(신앙생활을) '대충 적당히' 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려면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태워 없애는 것 같은 사랑을 해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 정도면 되겠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항상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사랑, 즉 신앙생활에서 '대충 적당히' 라는 말은 마귀의 유혹과도 같습니다. 도대체 적당한 기준은 누가 정할 수 있을까? 만일에 우리 마음대로 그 기준을 정한다면, 그래서 어느 정도 하다가 멈춘다면, 그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마태 10,24-25)." 당신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사랑의 목표 기준'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고...) 

그런데 얼마나 노력을 해야 예수님처럼 될 수 있을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노력한다면 그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노력한다면 될 것입니다.  

이런 말에 대해서 "그렇게 어려운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마르 10,26). 우리가 하느님(예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전적으로 우리의 힘만으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죽을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 사랑의 힘을 받아서 우리도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하느님사랑, 이웃사랑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기쁨과 은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슬픔과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아는 존재입니다. 또한 사랑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사랑을 하기에 믿음의 공동체가 존재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신앙의 선조들은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은 그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간절한 사랑은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은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나타납니다.

예수님

혹시 우리 가운데서 사랑하지 못한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했던 친구가 있으면 속히 화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하느님의 자녀들이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의 은총을 포기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널리 나누면서 항상 우리들의 마음에 기쁨과 여유가 넘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열매 맺는 사랑   반영억 신부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계명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 계명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 하면 십계명을 떠올립니다. 좀 더 요약하면, 사랑의 계명으로 말합니다. 과연 나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인가요? 내가 무엇을 행하거나 판단할 때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 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적대자들에게 지혜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주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 르12,31). 는 이중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였던 여러 부류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악의가 전혀 없이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고 그 계명에 대하여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 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12,32-33). 하며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 중에는 이렇게 마음이 열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축구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뻔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여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이중계명의 사랑은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어진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에로 인도되어 구원을 선물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많이 사랑하십시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 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그러므로 실행함으로써 열매 맺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앎’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마르 12,34)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나요?
하느님 나라는
어느날 느닷없이 죽어서 도달하는 그런 실재는 아닐지 모릅니다.
지상에 사는 동안 하느님 나라를 가까이 느껴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맛보고 사는 사람만이 천국을 그리워하며
죽음을 두려운 가운데서가 아니라 복되게 맞이할 수 있겠지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지상나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다스리심을 깊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오늘 나는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한번 재어봅시다.

여러분이 하느님 나라와 아주 가까이 계시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한껏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여라.”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를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오늘 주님께서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또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함께 매달렸던 죄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 갈 것이다.’ 율법학자와 죄인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어디에 있다!’라고 장소의 개념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관계의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정의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 주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주님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연구하였습니다. 이 원자들은 모여서 분자가 되고, 분자들은 또 모여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됩니다.

어떤 것들은 생명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우리 눈에는 사라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몸을 구성했던 모든 분자, 원자들은 없어지지 않고, 또 다른 형태를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100여개의 원자들이 모여서 형태를 이루고,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 행위에 따라서 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을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열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유한한 몸은 변화하고, 생명의 불꽃은 꺼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준다고 믿습니다. 이 또한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있습니까?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의 핵심이요, 율법을 완성하는 계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0)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순서상 첫째와 둘째일 뿐 사실 ‘하나’의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웃 사랑은 모든 계명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 하느님 사랑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대상이 인간이라면 눈에 보이고 쉽게 만질 수 있기에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는 나의 사랑에 항상 응답해 주시는 그런 분도 아니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어떻게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이라는 둘째 계명을 제시해 주십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의 기준은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렇다면 이웃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할 때는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은 곧 또 다른 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나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은 온전히 몸과 마음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 마음과 의지, 자신의 생명까지도 사랑하는 이에게 온전히 내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또 다른 나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우리에겐 오직 하나만이 남아 있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고준석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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