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금요일>(2015. 3. 6. 금)(마태 21,33-43.45-46)
야곱은 여러 아들들 가운데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다. 형들은 그를 미워하여 없애 버리려 했고,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다. 그러나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로 그는 그곳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장차 이스라엘 온 집안을 구하게 될 것이다(창세기 37,3-4.12-13ㄷ.17ㄹ-28).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에서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주인의 아들을 죽인다. 그렇지만 포도밭을 차지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다른 소작인들이다.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포도밭이 다른 이들에게 주어지게 된다. (마태오 21,33-43.45-46).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마태오 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세 37,20). 우리는 창세기에서 그 꿈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요셉이 꾸었던 꿈대로 그의 형들은 훗날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가 재상이 된 요셉 앞에서 절을 하게 될 것입니다(창세 42,6 참조). 요셉을 미워한 형들이 꾸민 계획과는 전혀 달리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형들이 꾸민 악을 하느님께서 선으로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구하고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요셉 이야기를 통하여 사람은 계획을 세우지만,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이 실감 납니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포도밭 주인의 아들로 비유되는 예수님을 죽여 없애려는 상황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암시하는 최악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들이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민족들이 하느님 나라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처럼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포도밭 주인의 아들이 살해됨으로써 포도밭이 다른 이들에게 넘겨지게 되었듯이, 이스라엘의 거부와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기에, 세상이 생명을 얻도록 외아드님을 내주셨던 것입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6)인데,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이스라엘의 특권 의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고, 그 특권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소작인들은 유대인들, 또는 유대교 지도자들이고, 주인의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소작인들이 주인의 종들을 죽이는 것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나타내고,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면 그만큼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걸핏하면 우상 숭배에 빠졌고 하느님을 등졌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회개시키려고 예언자들을 계속 보내셨는데,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구원을 보장받았다." 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 이 말은,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인간적인 혈통은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악마의 후손이다."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요한 8,39-40)."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요한 8,44)." 악마의 후손이라면, 하느님께서 악마를 완전히 멸망시키실 때 악마와 함께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신 것은 그들을 처벌하고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을 이스라엘 쪽에서 보면 그들에게는 구원받기 위한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구원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을 선택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특권을 스스로 버린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 말씀에서 '하느님의 나라' 라는 말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으로서 누리고 있던 이스라엘의 특권을 뜻합니다. '소출'이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뜻하고, '소출을 내는 민족'은 그리스도 교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을 안 믿고 거부한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지위와 특권을 잃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 교회가 그 지위와 특권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단순히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만을 나타내는 비유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그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 교회와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경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특권을 넘겨받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이 확정된 것은 아니고, 특권을 받은 사람들답게 살아야 할 의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특권이라는 말과 의무라는 말은 모순이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만 보면 모순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신 특권은 모든 의무를 면제해 주신다는 뜻의 특권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뜻의 특권, 즉 특별한 은총입니다. 만일에 자기 스스로 그 길에서 벗어난다면 특권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의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특권이 특권으로 계속 남아 있게 할 의무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구원의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종파가 있는데,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들'을 제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을 제대로 실천했는지가 심판의 첫 번째 기준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5,31-4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포도밭> -유광수 신부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놓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에서 얼마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
이 비유는 이사야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 "(이사 5, 1- 2)
이것은 사랑하는 임을 사모하며 부른 사랑의 노래이다. 임이 포도밭에 쏟은 정성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지극하였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임이 손수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 나무를 심었고,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 마련해 놓은 최상의 포도밭이었다. 얼마든지 많은 수확을 낼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다 마련해 놓은 포도밭이다. 임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하고 수확 철이 되어 가 보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들 포도가 달려 있으니 임의 실망이 오죽하였겠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즉 포도밭 주인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맺을 수 있도록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잘 가꾼 다음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주인은 그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포도 철이 될 때까지 잘 관리하도록 맡긴 것이지 넘겨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주인이 믿고 맡긴 그 포도밭을 정성껏 관리하여 많은 결실을 맺도록 잘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이 정성스레 가꾼 포도밭이다. 또한 나의 가정이 주님의 포도밭이고 나의 직장이, 나의 본당이, 나의 사도직 장이 주님께서 나에게 관리하도록 맡긴 주님의 포도밭이다. 나는 주님이 맡기신 주님의 포도밭이 많은 결실을 맺도록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가? 나의 몸을 함부로 또는 무리하여 병이 들게 하거나 또는 나의 가정과 직장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나에게 맡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는가? 자연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긴 포도밭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자연을 잘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의 자연은 온갖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의 관리 소홀로 자연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주인이 정성껏 만들어 놓은 포도밭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떠나 갈 때에는 가장 신임하는 소작인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쌍방간에 일정한 계약을 맺고 떠났을 것이다. "포도밭의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주인은 포도 철이 되자 당연히 종을 보내어 도조를 받아오라고 보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소작인들이 그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소작인들이 어떤 짓을 하였는가? 그들이 저지른 행동을 종합해보면 "첫 번째는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 보냈고, 두 번째는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며 모욕을 주었다. 세 번째는 이번에는 아예 죽어 버렸다. 마지막으로는 주인의 아들마저 잡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내어던졌다." 소작인들이 저지른 행동은 점 점 더 포악해져갔고 마침내는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버리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행동들이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반복해서 저질러지고 있는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들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오늘도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직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악한 행동들이다. 순박하기만 했던 소작인들 (농부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끔찍한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저지를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해서 악한 행동들이 이렇게까지 발전될 수 있었는가? 이 소작인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7절에서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기들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들 것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소유욕이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하고 동물로 타락하게 만들었다. 즉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동물처럼 본능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타락한 모습이다. 인간이 어떤 욕심에 너무 집착할 때 눈이 멀어진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이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 욕심에 집착할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인간 관계를 망쳐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다른 것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님, 귀머거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무서운 짐승으로 돌변하게 된다.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 된다.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는 소유욕이야 말로 인간이 쉽게 빠지는 유혹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이 소유욕 때문에 일어난다. 부모와 자식간에, 친척간에, 친구간에 이웃 간에 등 모든 관계가 악화되는 원인은 "내가 차지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이 욕심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였듯이 내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소유욕이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마음을 굳어버리게 만든다.
이번에는 주인의 입장을 묵상하자. 한번 당한 것도 분하고 괴심한 일인데 주인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길래 한번도 아닌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제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주인은 그렇게 당하하면서도 왜 그토록 보내시기만 하는가? 우리는 오늘 주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주인의 마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
이런 주인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벌써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악한 행동과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망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주인의 한 없는 이해와 용서와 인내의 덕분이리라.
주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라는 말이다. 주인의 행동을 잘 나타내는 동사는 "보내다"이다.
"보내다"는 동사가 5번 사용되었다. 보낼 때마다 사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주인의 행동은 계속해서 보냈다. 나중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에는 "알아 주겠지"하는 소작인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심이었다. 주인은 소작인들을 끝까지 신뢰했고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인내하며 또 많은 희생을 치루어 가면서까지 기다려 주었다.
"알아 주겠지" 라는 마음으로 보내고 또 보내는 주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머니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에서나 비슷하게 찾아 볼 수 있고 느껴 볼 수 있는 마음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 누구한테서도 나 올 수 없는 오직 부모만이 자식에게 보낼 수 있는 마음이다. 속는 것을 알면서도 또 돈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알 수 있을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
는 말이 있다. "알아 주겠지" 하는 주인의 마음은 그렇게 손해를 보면서도 또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또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밖에 설명 할 수 없는 것같다.
주님께서 걸으신 길 반영억라파엘신부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 꾼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을 우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속을 들켜버린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 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마르6,14-29),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장엄하게 죽어가는 예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을 하는 바람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요한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당당하고 불의한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주님 앞에서 항상 떳떳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죽음을 통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희생을 통해 다른 이를 이롭게 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싸우면 어떤 양이 이길까요? 선한 양? 아니면 악한 양?
힘센 놈이 이깁니다. 그런데 어떤 놈이 힘센 놈이 되느냐? 내가 밥을 잘 챙겨 주는 놈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밥을 주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보다 2000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막내로 태어났던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은전 스무 닢에 팔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은전 서른 닢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에게 편안한 집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요셉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잘못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의 세력인 사탄을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닮아야 할까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빌라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했던 군중을 닮아야 할까요?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창세 37,19-20)
여러분은 꿈을 많이 꾸시나요?
간밤엔 어떤 꿈을 꾸셨나요?
황당한 개꿈을 꾸지는 않으셨나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꾼 꿈 이야기를 들으며
어떨 때는 '웃기고 있네~' 하며 무시하고
또 어떨 때는 현실감 없는 사람이라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꿈이 없는 사람은
희망도 없고 생기도 없는 사람이기에
살아 있으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꿈쟁이였습니다.
형들은 그런 꿈쟁이 요셉이
미웠고 형들인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꿈이 진짜인지 시험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꿈쟁이 요셉의 꿈을 실현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나요?
어려서부터 많은 꿈들을 꾸셨지요?
지금은 어때요?
현실의 벽에 막혀
그 꿈들을 다 접어버리진 않으셨나요?
오늘은 내가 꾸워왔던 꿈들을 다시한번 돌아봅시다.
그리고 "내 꿈을 펼쳐라~" 하는 노래를
다시한번 불러봅시다.
멋진 하늘나라의 꿈을...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꿈을...
통일이 이루어진 대한민국에서
한 형제로 자유롭게 살게 되는 꿈을...
가에타노 간돌피 Gaetano Gandolfi 1790년 경, 유채, 개인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