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간 토요일>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루카 18,9-14)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돌아가자고 서로 독려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진솔한 회개의 기도도, 행위도 아니었다. 기도를 하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셔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권리 주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아 6,1-6).
바리사이의 기도 또한 하느님의 자비가 아닌 자신의 단식과 십일조가 하느님의 은총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 (루카18,9-14).
시편 51(50),3-4.18-19.20-21ㄱ(◎ 호세 6,6 참조)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 당신의 자애로 시온을 돌보시어,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주소서. 그때에 당신이 의로운 희생 제사, 제물과 번제를 즐기시리이다. ◎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18,9-14).
호세아 예언자
전쟁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돌아가려 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호세 6,3).
오늘 제1독서의 기도 내용에는 하느님께서 찾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자신의 노력에 비례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믿음은 한순간에 사라지는 아침 구름이나 이슬 같은 믿음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기도는 호세아서의 기도와 같은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강도 짓이나 간음을 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며 십일조를 바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기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꼿꼿이 서 있는 바리사이의 태도는 마치 하느님께 빚을 갚으시라고 요구하는 듯합니다.
기도하고 회개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 그래서 열심히 기도한다는 것, 일견 올바른 신앙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느님 자비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하느님의 자유도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오는 것이 됩니다.
스스로 구원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한 세리는 오직 죄인인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십사고 간청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하여, 오히려 의인으로 인정받고 돌아갔습니다. 그에게는 내세울 ‘번제물’이 없었지만 ‘하느님을 아는 예지’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와는 달리 그의 눈길은 자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
바리사이와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갑니다. 세리는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치면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루카 18,13).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겉으로 보기에는 바리사이가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자신이 말한 대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고 선언하십니다(루카 18,14). 바리사이의 기도는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세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 세리의 기도를 받아주셨고, 그의 회개를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세리는 성전에 갈 때에는 죄인이었는데,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의인이 되어서 돌아갔습니다.
바리사이가 의롭게 되지 못했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 바리사이의 기도를 받아주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바리사이는 성전에 갈 때에도 죄인이었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여전히 죄인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바리사이의 기도를 안 받아주셨을까?
바로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 마태오복음에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아마도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숨은 일'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강도짓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강도와 같다는 것을,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의 생활은 의롭지 않다는 것을, 간음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간음죄를 짓고 있음을,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세리와 다르게 살고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다르지 않음을 보셨을 것입니다. 또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위선과 허영과 교만에 가득 찬 거짓 신심이라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꼿꼿이 서서' 라는 말은 바리사이의 교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혼잣말'이라는 말은,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화자찬이고, 독백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루카 18,9)" 말씀하셨습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자신의 죄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함부로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죄도 지었습니다.
그러면 바리사이의 기도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그는 기도를 어떻게 했어야 하나?) 답은 간단합니다. 바리사이도 세리처럼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어야 합니다. 다른 기도는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오늘날에도 자기 잘난 체를 하면서 그것을 감사기도라고 바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이웃의 불행과 고통은 외면한 채 자기가 받은 복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는, 이기적인 기도만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1) "나는 죄가 없다." 라는 말, "내가 한 일은 죄가 아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자기 자신의 무죄를 선언하는 짓이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가 됩니다. 심판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2)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나는 그 사람보다 죄가 작다. (또는 없다.)"고 말해도 안 되고, "그 사람의 죄는 나보다 크다."고 말해도 안 됩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심판자가 되는 짓이 되고, 이것도 역시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가 됩니다. 누구의 죄가 더 큰 죄인지를 판단하시는 것도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3) 회개와 보속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서 "나는 용서받았다." 라는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4)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회개한 후에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았다면, 용서받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고 계속 자책하면서 같은 죄에 대해서 고해성사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것은 믿음 없는 태도가 됩니다.
5) 다른 사람의 회개를 인정해 주어야 하고, 믿어 주어야 하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어떻든 회개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빌면, 무조건, 무한정 용서해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사순 3주간 토요일 (루카18,9-14)
겸손한 죄인 반영억 신부
성직자가 좋아하는 신자는 우거지 신자이고 싫어하는 신자는 원불교신자랍니다. 우거지는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원불교는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신자랍니다.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올바른 사람이다.’ ‘나는 아무개 보다 더 낫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게 된다면 알맹이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온갖 선을 행하고 신앙의 규정을 철저히 지켰더라도 하느님의 눈에 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없고 오로지 냉혹한 비판만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요,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의인처럼 살아도 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죄인보다 못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에 순명한 후 주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5,8)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나면 죄로 얼룩진 과거의 삶이 보이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미래의 삶이 보일 뿐입니다. 주님의 소명이 나를 재촉합니다. 나의 허물이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없고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마크라슈나 우화
한 수도원에 유명한 수사님이 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수도원 가까이에 매춘부의 집이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사내들이 매춘부의 집에 들어갈 때마다 뜰에 돌을 하나씩 주워 모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돌무더기가 점점 커지자, 수사님은 매춘부를 불러 그 돌무더기를 보여주며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매춘부는 두려움에 떨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날 밤 죽음의 천사가 찾아와서 수사님도 매춘부도 함께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매춘부는 천국으로 가고 수사님은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수사님은 항의 하였습니다. 일생을 금욕과 절제 속에서 하느님을 흠승하며 살았는데 왜 지옥으로 가야 하느냐? 일생을 간음죄만 짖고 함부로 살았던 여인이 천국으로 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느님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수사님, 하느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수사님은 평생 수도자라는 자만심과 명예만을 지키며 살면서 죄만 가릴 줄 알았지 사랑을 베풀 줄은 몰랐습니다.”

‘의학’은 사람의 몸을 돌보는 학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정교한 메커니즘에 의해서 스스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려합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뜻하지 않았던 사고로, 강력한 외부의 병원균 혹은 바이러스에 의해서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흔들리게 됩니다.
의학은 건강한 사람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아픈 사람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입니다.
서양의 의학과 동양의 의학은 사람의 몸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서양의 의학은 아픈 부위를 집중적으로 치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약, 수술, 방사선 등의 처방을 많이 내리곤 합니다. 서양의학은 눈에 보이는 효과가 탁월하다고 하겠습니다.
동양의학은 사람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픈 부위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력을 회복하게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침, 뜸, 보약은 우리 몸의 혈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도움을 줍니다.
눈에 보이는 효과는 적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몸이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적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몸을 돌보고, 건강을 회복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서양의학, 동양의학 모두 고마운 학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파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파는 기도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단식을 하였고, 봉사를 하였고, 십일조를 충실하게 바쳤고, 율법을 잘 지켰고,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하느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치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하였고, 음식 조절을 하였고, 술과 담배는 멀리하였고, 노후를 위해서 적금도 충실하게 넣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만 살아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잘 하였는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시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나의 행위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더 높게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입니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조재형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