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벳자타 못가 병자치유> 요한5,1-16

2015. 3. 17. 오전 6:25:56

글자

 

[나해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47,1-9.12 <벳자타 못가 병자치유> 요한 5,1-16

바빌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에제키엘은 이미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고한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넘치게 한다. 다시 세워진 성전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현존하시며 예루살렘이 살아나게 하시기 때문이다(에제키엘  47,1-9.12 ).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 온 병자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으로서 죽어 가는 병자를 살리시지만, 그날이 안식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한다(요한 5,1-16).

 

 

시편 46(45),2-3.5-6.8-9(◎ 8)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이 빠진다 해도. ◎
○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이 세상에 이루신 놀라운 일을! ◎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요한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불운한 시기에 활동하던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이미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한 환시를 봅니다.

그가 주님께서 성전을 떠나가시는 환시를 본 뒤(에제 10장 참조), 성전이 파괴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겪은 다음 그는 주님께서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환시를 봅니다(에제 43장 참조).
주님께서 성전에 돌아오시면 예루살렘에는 생명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나무가 자라고 물고기가 우글거리며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주님께서 계신 집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그 회복된 예루살렘을 “야훼 삼마”(에제 48,35), 곧 ‘주님께서 여기 계시다.’고 부릅니다. 주님의 현존이 예루살렘에 생명을 줍니다.
에제키엘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오고 성전을 재건할 때부터 실현되기 시작하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심으로써 다른 차원에서 성취됩니다. 벳자타 못 가에 누워 있던 병자는 물이 출렁거릴 때에 자신이 물에 들어가도록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물의 힘으로 건강을 되찾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낫게 한 것은 벳자타 못의 물이 아니라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요한 5,11)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성전이 아니라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하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요한 5,21 참조)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인데,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은총을 받은 사람의 배은망덕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벳자타 못 가에 누워 있었던 병자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다는 것은(요한 5,5)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의 병을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면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안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장 바라고 있었던 일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못 속에 들어가는 것뿐입니다(요한 5,7). 그가 예수님께 한 말은, "저를 도와주시려거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못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로 해석됩니다.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건강하게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실제로 그런 기적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고,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 병자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었을 것입니다. 그 병자는 서른여덟 해 동안 그런 다툼을 계속 겪었을 것입니다. 주변에는 이기적인 사람만 가득했고, 그 병자의 마음속에도 원망과 미움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 병자에게 믿음도 없고, 그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신 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자비'는 원래 조건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신 다음에도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병자가 병이 나은 것을 본 사람들 가운데 축하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기뻐하는 사람도 없고, 안식일에 들것을 들고 간다고 꾸짖는 사람만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람은 안 보고 법만 봅니다. 물론 그 병자가 서른여덟 해나 누워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먼저 사정을 물어보았어야 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병자입니다. 그는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요한 5,11)."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은 내 탓이 아니라 그 사람 탓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 병을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병을 고친 다음에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든 그는 자기 병을 고쳐주신 분을 찾아다니다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유대인들에게 가서 밀고합니다(요한 5,15). 이것은 38년 동안의 지옥과 같은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에 대한 배은망덕입니다. 아마도 병고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위험에 대한 무서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병자 입장에서는 병을 고친 일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우연히 얻은, 글자 그대로 뜻밖의 행운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언제 병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까? 청하지도 않은 것을 주시면서 왜 안식일 규정을 어기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항의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예수님)은 믿음 없는 사람에게도, 악인에게도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5,45). 그러나 그 은총을 받는 사람 쪽에서 잘 받아야 합니다. 누가 보아도 분명히 은총인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운이 좋아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누구나 다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총이 은총인 줄 모르면, 받은 은총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빼앗으신다는 뜻이 아니고, 은총으로 작용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면서 하느님께 부르짖던 이스라엘이 좋은 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셨지만, 그들은 고향에 돌아가서 편안하게 살게 되자 바로 우상 숭배에 빠져버렸습니다(판관 2,11-13). 자기들이 얻은 자유를 우상의 노예가 되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이 말씀에서 '되돌아오는 악령'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24-26)." 악령에게서 해방되어도 성령과 함께 살지 않는다면, 더 많은 악령들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깨끗해진 다음에 방심하고 자만하다가 더 큰 죄를 짓는 모습과 같은 것.)

몸의 건강을 죄 짓는 일에 사용하고, 그래서 영혼은 병든 채로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건강이라는 은총을 주신 하느님을 배반하는 배은망덕이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은총을 저주로 바꿔버리는 일입니다.

 

벳자타 못

사순 4주간 화요일 (요한 5,1-16)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반영억 신부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거리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 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대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 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건강해 지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자신의 병이 가장 절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 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거리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예루살렘에는 유명한 치유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벳자타라고 하는 이 연못은 가끔 물이 출렁일 때가 있는데
그때 가장 빨리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치유를 받는다는 전설이 있어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요행수만 바라지 말고
들것을 들고 일어나 보라고 하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기고 38년을 그냥 물만 쳐다 본 이 사람에게
"아니다. 너는 할 수 있다. 해 봐라!" 하신거죠.

여러분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십니까?
그래서 무기력하고 요행수만 바라고 기적만 바라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벌떡 일어나 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일어나 걸어 가보라!" 하십니다.
그냥 "예" 하고 일어나 보십시오.
축하드립니다 ~~^^

생명수

 

철학 시간에 ‘Prima Causa'라는 말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1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면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우리가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잘 모를 뿐이라고 합니다.

제 방에는 제가 오기 전부터 있던 것들이 있습니다. 고상, 시계, 책장, 옷장, 책상, 거울, 소파와 같은 것들은 제가 오기 전부터 제방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제 방에 오게 된 이유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지난 40년 한국의 경제 발전은 대통령과 재벌의 지도력과 경영 능력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근면함과 성실함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어려운 여건에서 고통을 감수하며 피와 땀을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탄생의 순간을 빅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 커다란 폭발이  있었고, 그때부터 우주의 모든 것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광대한 우주의 탄생치고는 초라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의 탄생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정자와 난자의 만남일 수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배우자의 사랑의 결실인 것처럼 우주의 빅뱅 또한 누군가의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그것을 제1원인이라고 말하고, 신학은 그 대상을 하느님이라고 믿습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됩니다.’ 꼭 물만이 아닙니다. 같은 공기, 같은 음식을 먹어도 먹는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기도 하고, 세상에 추한 모습을 남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들어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기, 분노, 질투, 욕정, 탐욕, 미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생명을 살리는 물, 생기와 활력을 주는 물을 보았습니다. 물은 필요하고,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단순히 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의 삶이 생명을 살리는 말과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동창 신부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용이 곧 방법이고, 방법이 또한 내용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삶의 태도도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우리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창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물과 관련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2번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고,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도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 네가 마시는 물은 곧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물이 힘이 있고, 물이 영적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물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물은 단순히 정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38년 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사람을 치유시켜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꼭 물속으로 들어가서 씻어야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조재형 신부

 

 

배낭과 미사가방에 대한 내 애착이 참으로 큽니다. 

늘 순례여정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요, 

하느님 주신 평생 지고 가야 할 내 운명의 '선물'이자 '짐'인 십자가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등에 업고 가듯이 산티아고 순례 때에 꼭 내 십자가를 상징하는 배낭에 미사가방을 넣고, 신들린 듯이 걸으며 매일미사를 봉헌하며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늘 끊임없이 되뇌었던 기도문은 다음 시편 구절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사실 산티아고 대성전에 가까울수록 설레는 마음에 뛰듯이 걸었습니다. 어제 오늘 복음 묵상 중 이 모든 것의 의미가 다음 한 구절로 다 풀렸습니다.

"Rise, take up your mat, and walk,“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읽었기에 실마리가 풀렸습니다. 즉시 연상된 것이 루카 복음(6,23)의 말씀이었습니다.

"If anyone wishes to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38년동안 벳자타 못가 옆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하신 주님 말씀과 일치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deny)' 대신 '일어나(rise)'란 말로, 

'네 들것을 들고(take up your mat)' 대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take up his cross daily)'란 말마디로, '걸어가거라(walk)' 대신 '나를 따라라(follow me)'란 말마디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과거의 온갖 부정적 아픈 추억들을 말끔히 버리고, 불운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deny), 벌떡 일어나(rise)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날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걸어가라(walk)'란 말은 '나를 따라라(follow me)'란 말씀으로 구체화됩니다. 

막연히 살아가는게 아니라 십자가를 상징했던 '들것(mat)'을 버리지 말고, 잊지 말고 늘 보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달고 있는 노란리본처럼 말입니다. 

하여 얼마동안이 될지는 몰라도 나는 오늘 복음의 병자의 '들것(mat)'대신 산티아고 순례 때의 '배낭(knapsack)'을 늘 놓고 보려고 집무실 한편에 놓아 두었습니다.

아, 오늘 복음 말씀은 38년 누워있던 병자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진짜 벳자타 못은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에제키엘이 환시 중에 보았던 '생명수의 강'의 시원(始原)인 '주님의 집'은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1독서 에제키엘서의 후반부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참으로 놀랍고 풍요롭습니다. 

우리 영혼의 식(食)과 약(藥)이 되는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다시 새롭게 살아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충전시켜 주시며 사랑 가득 담긴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라라(Rise,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아멘

 이수철 신부

 

 

독서 : 에제47,1-9.12
복음 : 요한5,1-3.5-16

* 말씀 길라잡이 *
벳자타 연못에 주랑이 다섯 채 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38년 동안 앓아 누워있는 자가 있다.
벳자타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 자비의 집에서 38년 동안이나 자비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연못은 율법 전체요,
다섯 주랑은 율법서 다섯 권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이런 상징이 옳다면 예수님은 유다교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생명의 길을 제시하고 계시다.

이 병자는 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병이 나았다.
이 이야기에서는 치유를 위해 믿음이 필요치 않았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다(5,1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실 때 결코 사람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신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나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보다는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일어난 것을 문제 삼고 있다(5,10).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 주는 표시로 안식일을 준수했기 때문에  안식일에 관한 법을 엄격하게, 그리고 문자적으로 지켰다.

자신들이 규정한 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사랑의 법'보다 더 중요시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고 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뜻을 완성하시며  하느님의 재창조의 활동과 연결시키신다.
또한 부활하셔서 안식일의 궁극적 의미를 성취하셨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일요일을 주님의 날, 곧 주일로 지킨다.

* 새김 *
< 헛되게 살아서는 안 돼>
10살, 겨우 베개 하나밖에 들 수 없었어.
12살, 지팡이를 짚고 길을 걸었지.
14살, 마당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어.
16살, 완전히 걸을 수 없게 되고 다만 서 있는 것만 가능했지.
18살, 땅에 내려갈 수 없었어.
20살, 머리 위로 팔을 들지 못하게 됐지.

지금은 물 한 잔도 들지 못한단다...
하지만 이토록 잔인한 현실에서도 난 한 번도  죽거나 숨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나의 생각은 오직 이것뿐이야.
인생이 어떻든 헛되게 살면 안 된다는 것!
절대로 헛되게 살아서는 안 돼! (장윈청, -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

* 실천 한 가지 *
오늘 쇼핑하고 남은 동전은 이웃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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