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수요일]<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17-30)
하느님께서는 가련한 이스라엘을 위로하시면서 그들에게 기뻐 뛰라고 말씀하신다. 멸망한 시온은 주님께서 자기를 잊으셨다고 생각하지만, 여인이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없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이사야 49,8-15).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 가에서 행하신 치유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대로 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주장하신다. 유다인들은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한 5,17-30).
시편 145(144),8-9.13ㄷㄹ-14.17-18(◎ 8ㄱ)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네.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네. ◎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요한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 거룩하시도다! …….
<지금이 바로 그때다.> 송영진 모세 신부
안식일인데도 병자를 고쳐 주었다고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의 뜻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 없다."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창세 2,2), 이 말은 창조 작업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뜻이고, 세상을 다스리고 보살피는 일은 쉬지 않고 하신다는 것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좀 더 풀어서 표현하면,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보살피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하시니, 나도 그 일을 한순간도 멈출 수 없다. 그 일은 안식일에도 해야 한다."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안식일 규정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이 말씀을 "아버지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만들어 주셨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자비를 베푸는 일마저도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도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율법만 내세우면서 자비와 선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일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그렇게 일하시니 아들로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일은 곧 아버지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버지와 예수님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과 예수님의 일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도 믿어야 합니다. 믿고, 믿음 속에서 선을 행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이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믿어야 하고, 내 말을 들어야 한다."입니다.
영생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언제인지 모를 먼 훗날의 일에 대한 막연한 약속이 아닙니다. 영생은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생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말한 내용에 대해서 "그것을 증명해 보아라." 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택과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때가 되면 당신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최후의 심판 날이 되면, 죄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회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일 뿐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지금' 회개해야 하고,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믿고, 실천한다면, 멸망을 피하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나중으로 미루어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선을 행하는 것은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보통 "심판을 받는다."고 표현하지만, 심판이란 받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왔을 때 하는 선택이 아니라 '지금' 하는 선택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써 생명이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선택했다면 '끝까지'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 신앙생활은 '좁은 문'을 향해서 가는 생활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그 문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에 저를 맞춥니다. 반영억 신부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충실히 머물렀고 그래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고 “나 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 하여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꼭 해야 하는 일인지? 가끔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혹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 해도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집니다.” 참된 믿음은 어려움을 겪을 때에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나길 기도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시나무 새 - 시인과 촌장- 하덕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매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은 쉴 곳 없네.
@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이미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영화 ‘패키’를 보았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로봇은 우리가 하기 싫은 일들을 대신 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로봇은 지금도 우리 삶의 곳곳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세탁기, 청소기, 무인 비행기’ 등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보지 못하는 곳에서 많은 로봇들이 사람의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자동차도 목적지만 입력하면 알아서 운전하는 시대도 올 것입니다.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가서 ‘인공지능’을 이야기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골격은 인간의 신체를 능가하는 로봇입니다. 인간과 같은 마음을 지닌 로봇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마음과 신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옷을 갈아입듯이 마음은 저장할 수 있고, 저장된 마음은 다른 몸체에 옮길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몸만 바꿀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정신, 이성, 오성, 마음, 영혼’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신이란 기운과 같습니다. 이 기운이 건강하면 건강한 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성이란 인류의 문화, 역사, 전통을 교육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오성이란 배우지 않았어도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능력입니다. 이것을 양심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음이란 수식어와 함께 쓰일 때가 많습니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선한 마음, 악한 마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일을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영혼은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숨결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이 우리의 몸에 영혼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모두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心身不二’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이 없는 몸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갈등과 분쟁은 그릇된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몸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모두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몸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몸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은 어쩌면 인류라는 같은 영혼의 아픔과 고통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부모의 체질과 성격을 닮게 되고, 그 집안의 가풍과 문화 속에서 자라나기에 그 집안의 가문을 따라가게 됩니다. 간혹 부모님과 그 가문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이웃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살아가다 보면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판단이 올바른 것인지 식별하기가 늘 쉽지만은 않습니다.
묘안이 없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그 방법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가르쳐주시네요.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많이 들어라. 이 사람 저 사람의 자문을
들을수록 실수할 확율이 줄어들겠지요?
그런데 그래도 미덥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자문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문입니다.
어떤 전문가의 말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 들어야 한답니다.
그리하여 내 뜻을 추구학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려고 하면
올바른 판단이 선다는 것이지요.
오늘 혹은 가까운 미래에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이 있으신가요?
꼭 이렇게 해 보세요.
아니 꼭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