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금요일>(2015. 3. 20. 금)(요한 7,1-2.10.25-30)

악인들은 의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짐스러워 그를 없애려 한다. 그들은 올바른 삶에 대한 갚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의인의 ‘최후’에는 하느님께서 그를 구해 주시어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었음을 입증해 주실 것이다(지혜서 2,1ㄱ.12-22).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다가옴을 아시면서도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 가시어 거리낌 없이 성전에서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요한 1-2.10.25-30).

시편 34(33),17-18.19-20.21과 23(◎ 19ㄱ)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신다.
○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
○ 그의 뼈를 고스란히 지켜 주시니, 뼈마디 하나도 꺾이지 않으리라.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혜서에서는 악인들과 의인들의 처지가 서로 대립하여 나타납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삶의 마지막에 대한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현세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의인은 불멸을 믿습니다. 의인은 하느님을 알고, 그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돌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설령 악인들이 자기를 죽이기까지 하더라도 그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압니다. 오히려 악인들이 의인을 죽이고 나면 그 의인의 영혼이 하느님의 손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습니다(지혜 3장 참조).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나자렛 출신의 한 인간으로만 생각하는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이해하십니다.
그분은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기에, 죽음의 순간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드러나리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의 때”(요한 7,30)는 그분 죽음의 때이고 또한 그분 영광의 때입니다.
그분을 죽인다 해도 그분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께 손을 대거나 그분을 죽일 수 없습니다.
의인들도, 하느님의 아드님도 죽음을 피해 가실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이 세상의 권세가 승리했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죽음을 넘어서까지 그분을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인들의 종말은 행복합니다(지혜 2,16 참조).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반영억 신부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우리를 나무라고 탓하는 자, 그를 모욕으로 시험해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간다 할지라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너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이 확인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있어서 따르기보다 먼저 따름으로써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습니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났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요즘 세상은 ‘얼짱’, ‘몸짱’을 선호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며 이해심 많은 ‘맘짱’에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용모나 신장의 선입견에 갇혀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 사람의 속의 일부를 볼 수 있을지언정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겉모양으로 그의 믿음 모두를 판단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벽을 넘어 ‘내가 만든 예수님 상’을 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믿음>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메시아는 초자연적으로 신비스럽게 등장해야 하는데 예수에게는 그런 신비가 없다. 그러니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말에서 두 가지 오류가 보입니다.
1) 메시아가 초자연적으로 신비스럽게 등장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 마음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메시아는 그렇게 등장해야 한다고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적도 없고, 예고하신 적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정해 놓은 틀을 하느님께서 따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2)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는 나자렛 출신이고,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다."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출신과 가문을 알고 있다고 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유대인들의 태도는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가족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마르 6,3).
이것은 마치 성경이라는 책의 겉모습만 보고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안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책을 무슨 종이로 어떤 인쇄소에서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를 알기 때문에 성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또 활자로 인쇄를 해서 고급스럽게 장정을 했든지 낡은 종이에 손으로 옮겨 적어서 초라하게 만들었든지 간에 성경은 성경입니다. 그런데도 만일에 "시골의 무식한 사람들이 낡은 종이에 서툴게 옮겨 적었으니 이 책은 성경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태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는 "너희는 내가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나의 직업이나 가문이나 가족 관계 등을 알고 있다." 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는 "너희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다."입니다. (이 말씀에는 "나는 나자렛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왔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시다."입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일차적으로는 "너희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라는 뜻인데, 좀 더 깊은 뜻으로는 "너희는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있다."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는 "나는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다."입니다.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완전한 일치'를 뜻합니다. (뒤의 10장 30절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는 "나는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지금도 함께 있기 때문에 그분과 일치되어 있다."입니다. (앞의 1장 1절에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내다.' 라는 말은 '떠나보내다.'가 아니라 '임무를 주다.'로 해석됩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떠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또 하느님께서도 예수님을 당신 곁에서 떠나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늘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사람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로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학자로서 아는 것과 신앙인으로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연구(공부)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 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실천이 없다면 예수님의 인간적인 겉모습만 보고 안 믿은 유대인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랑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인생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말씀'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제방에는 러닝머신이 있습니다. 하루에 3시간 정도는 러닝머신을 이용해서 걷곤 합니다. 명동에서 혜화동까지 걸을 때도 있습니다. 하루에 3시간만 걸으면 보약을 먹지 않아도, 다른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을 유지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많이 걸었습니다. 교통수단이 별로 없었고, 필요한 것들은 많이 걸어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분이 있다면, 비만 때문에 고민이 있다면, 스트레스 때문에 힘든 분이 있다면 걷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걷는 중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러닝머신은 3년 전에 지인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한 달 전부터 소음이 있었습니다. 어제 혜화동에서 명동까지 걸어오는 길에 ‘WD-40'이라는 윤활유를 하나 샀습니다. 러닝머신의 이곳저곳에 윤활유를 뿌려 주었더니, 소음이 없어졌습니다. 2500원 짜리 윤활유가 저를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기계에도 윤활유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어제 러닝머신에 뿌려진 윤활유처럼 위로와 기쁨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에 녹는 소금인형처럼 자신을 내주면서 맛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편견과 시기로 가득찬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 때문에 밝는 날에도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해 봤는데 안 된다고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 탄 버스는 내려서 갈아타야 하는데, 지금 버스 안이 편하다고 하면서 계속 머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만남과 우리들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제 아주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어떤 이발사가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제자를 한 명 맞이했습니다. 3개월 동안 열심히 스승님께 기술을 익힌 제자는 드디어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그는 그 동안 배운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여 첫 번째 손님의 머리카락을 열심히 깎았습니다. 그러나 거울로 자신의 머리 모양을 확인한 손님은 투덜거리듯 “머리가 너무 길지 않나요?”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초보 이발사가 손님의 말에 아무 답변도 못하고 있을 때, 스승님이 웃으며 말합니다. “머리가 너무 짧으면 경박해 보인답니다. 손님에게는 긴 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걸요.” 이 말을 들은 손님은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갔습니다.
신부님들과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신발을 벗었는데 냄새가 심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코를 막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의 말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바꾸었습니다. ‘오늘 일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하루 종일 신자들과 만나면서 열심히 일을 했기에 발에서 냄새가 난다고 이해하시는 신부님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유대인의 초막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요한 7,28-29)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은 저를 아시나요?
이런저런 정보를 좀 아시겠지요?
그런데 그걸로 저를 안다고 하실 수 있나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맘속은 모른다고~~
저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모아도 그게 저는 아닐 겁니다.
저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제가 하느님과 어떤 사이인지
또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까지 아는 사람입니다.
저 자신도 모르는 것까지도 사랑하면 보이게 되지요.
사랑하면 알리라~~
하느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일 겁니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빈 껍데기만 아는 것입니다.
그건 결국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얼마나 아세요?
하느님을 참으로 알고 싶으세요.
그럼 더 많이 사랑하세요~~^^
유대인의 초막절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