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하다 잡힌 여자 (요한8,1-11)

2015. 3. 23. 오전 7:22:19

글자

 

<사순 제5주간 월요일>(2015. 3. 23. 월)(요한 8,1-11)

 

수산나와 두노인

 

수산나는 이국땅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았다. 재판관 두 사람이 음흉한 마음을 품고 수산나를 곤경에 빠뜨릴 때에도 그녀는 주님께 죄를 짓기보다는 사람들의 손에 걸려들기를 선택한다. 주님께서는 수산나의 기도를 들으시어 다니엘을 보내시고, 그는 지혜로운 재판으로 그녀를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다니엘 13,1-9.15-17.19-30.33-62<또는 13,41ㄹ-62>).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구해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신다. (요한 8,1-11).     

 

 시편 23(22),1-3ㄱ.3ㄴㄷ-4.5.6(◎ 4ㄱㄴㄷ)
◎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루카스 크라나흐,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하느님의 지혜가 사람의 생명을 구합니다. 인간적인 사고로는 이루지 못할 일까지도 이룹니다. 오늘 제1독서는 수산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다니 13,45)고 전합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재판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지혜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의 인도에 힘입어 수산나를 올가미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 또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하느님의 지혜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도 올가미에서 벗어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을 살펴보면, 논리적인 측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죽이라고 할 것인가, 죽이지 말라고 할 것인가?’ 율법 규정에 따르면, 그 여자를 돌로 치는 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금하신다면 모세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제시하는 선택 가능성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택하십니다. 율법 규정과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지혜로 그 여인을 살리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목숨만을 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에게 새로운 삶도 열어 주십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죄인인 그 여자의 죽음이 아니라 그 녀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The woman caught in Adultry (간음하다 잡힌 여인)

 

우리는 최고의 존재        반영억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단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십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 갔습니다.(요한 8,9)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 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 쓰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제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충만한 주님의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희망하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마태5,45)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됩니다.” “하느님 마음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최고의 존재입니다. 설령 죄의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 마음에 전부입니다. 그분께 용서 청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간음한 여인의 독백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다른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보통 우리는 그때 분노하거나 흥분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게 최상의 방법일까요?
물론 죄는 미워해야겠지요.
그렇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선인들은 말씀하셨지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어떤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하면 그 죄를 자기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 나무란다고.....
자신의 죄를 생각한다면 어찌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고 분개하고 흥분할 수 있겠습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죄를 짓고 살아왔기에 먼저 자리를 뜬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며 먼저 아파하며 내 죄를 돌아보고 통회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다른 사람의 죄와 악행이 눈에 보이면 그 사람을 위해 주모경 한번 바쳐주고
내가 지은 죄를 통회하기 위해 주모경 세번을 바치면 어떨까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

[펌]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송영진 모세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라고 말합니다(요한 8,3-5).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요한 8,6). 여자를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여자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면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예수님을 고소할 것이고, 반대로 율법대로 처벌하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동안 용서와 자비를 가르쳤던 것과 모순된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또 당시에는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법을 위반했다고 고발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십니다(요한 8,6).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셨다는 점입니다. 이 침묵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도를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나를 고소하고 싶다면 내 의견을 묻지 말고 그냥 고소하여라. 고소할 구실이 없다면 그냥 떠나라." 정도의 뜻이 들어 있는 침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답변을 재촉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8,7). 그리고 다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요한 8,8). 

예수님 말씀의 뜻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정도로 죄 없는 사람은 없다."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심판할 권한은 인간에게는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은 산상 설교의 가르침을 다시 확인해 주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침묵은 그들이 자신들의 내면을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침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예레 17,13)."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하느님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만,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은 그 이름이 땅에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땅에' 쓰셨다는 점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이름을 쓰신 것은 아닐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이름을 '땅에' 쓰시는 것을 보면서 예레미야서의 구절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죄 없는 자가 먼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모두 다 떠나갑니다(요한 8,9).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떠나갔으니 그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고백한 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적어도 양심은 살아 있었던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떠나가긴 했지만, 그것은 아직은 회개하는 단계는 아닙니다. 죄를 인정했다면, 그 다음에는 진짜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자기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입니다. 또 자기의 죄를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세상에서는 그 여자는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생각하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를 끌고 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여자의 죄는 드러난 죄이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는 드러나지 않은 죄입니다. 어느 쪽 죄가 더 큰 죄인지는 하느님만 아십니다.

하느님만 아신다는 말은 인간들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죄가 크든 작든, 많든 적든, 회개는 양쪽 다 해야 합니다. (사실은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회개하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 형제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4)."

지금 나에게 죄가 없어서 형제를 꾸짖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도 죄가 있지만, 형제와 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꾸짖는 것입니다. 처벌하기 위해서 꾸짖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해서, 또 용서하기 위해서 꾸짖는 것입니다.

(건강한 내가 아픈 형제를 치료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아프지만, 또는 그 아픔을 나도 겪고 있기 때문에 사랑으로 형제를 치료해 주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이 이야기는 "너, 회개하여라." 라는 말을 하면 안 되고, "우리, 함께 회개하자." 라고 말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저는 불평과 불만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첫째는 가정형편입니다. 집이 없어서 어린 시절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주인 집 아이에게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낼 육성회비도 제 때에 내지 못하였습니다.

가난이 불행은 아니지만 가난은 참 많이 불편하였습니다. 둘째는 외모입니다. 키도 작았고, 운동신경이 별로 없어서 운동도 잘 못했습니다. 예술적인 감각도 적어서 그림도 잘 못 그렸습니다. 거울 앞에서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저 자신을 보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열등감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들이 사치였음을 느끼게 해 준 분이 있습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이 지연씨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그녀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을 쓰면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110역을 해내는 엄지손가락으로 생활하고 글을 쓰면서는 엄지손가락을 온전히 남겨주신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여과 없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사람에게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았고 막대기 같아져 버린 오른팔을 쓰면서 왜 하느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손이 귀까지 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온전치 못한 오른쪽 귓바퀴 덕분에 귓바퀴라는 게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느님이 정교하게 만들어주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잠시지만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절뚝 걸으면서는 다리가 불편한 이들에게 걷는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피부가 얼마나 많은 기능을 하는지. 껍데기일 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피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남겨주신 피부들이 건강하게 움직이는 것에 감사했으며 하느님이 우리의 몸을 얼마나 정교하고 세심한 계획아래 만드셨는지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백분의 일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얼굴도 이름도 초라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 기분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 테니까 그 누구도 , 그 어떤 삶에도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은 옳지 않습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은 시편 23장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한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조금 손해를 볼지라도, 양심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할 때, 그래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그런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죽음의 골자기를 간다 할지라도, 주님 함께 계시면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나이다.’ 힘든 시간, 어려운 시간이 닥칠지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굳센 믿음으로 사순시기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 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창세3,8~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였다." (6)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갑자기 등장한 예수님의 존재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이루어졌던 성전에서의 매매 행위를 질책하고 단죄하였으며, 안식일 규정까지 어긴 자로 여겨졌다. 그리고 자신들이 갖지 못한 이적을 행하는 권능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사회적 입지를 흔들어 놓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성전 경비병들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요한7,45) 

따라서 이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 이루어진 유능한 이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 파멸케 하려는 계략을 꾸몄다. 이것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8,6ㄱ).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기에 이러한 계략은 결국 하느님을 시험하는 불경을 저지른 꼴이 된 것이다.  영적 무지와 종교적 편견으로 가득찬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행하겠다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요한 복음 8장 6절의 '쓰기 시작하였다'에 해당하는 '카테그라펜'(kategraphen; started to write)'카타그라포'(katagrapho)미완료 시제로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쓰거나 그리기 시작하였다'는 뜻이 된다. 이 동사는 '쓰다'는 뜻 뿐만 아니라 '그리다'(draw figures)는 뜻도 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것예수님께 와서 흥분하며 조급하게 판단을 요구하는 무리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사악한 음모와 한 여인이 죽을 수도 있는 험악하고도 긴박한 상황 속에서 놀라운 평정심을 유지하시며 땅에 조용히 글을 쓰시는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요한 복음 8장 7절에 나오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씀을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 성서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 쓰신 이 행위가 구약의 예레미야서 17장 13절을 연상시키는 상징적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요한 복음 8장의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이야기에서 요한 복음 8장 6절과 8절에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글을 쓰신 것은 예레미야서 17장 13절을 연상시키는 상징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였다.' (6)'너희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7)'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8)

한마디로 '그 여자를 죽이려고 돌을 든 너희들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 (예레17,13)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9) 나이가 많다는 것은 젊은이들보다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젊은이들보다 깨달음과 이해가 먼저 오는, 삶의 경륜과 지혜가 있음을 드러낸다. 동시에 나이가 많다는 것은 오래 살았으니 죄도 많이 지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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