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2015. 3. 25. 수)(루카 1,26-3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 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예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역산한 것이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도록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응답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성모님의 응답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응답으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전쟁의 위험 속에서 하느님을 믿기 어려워하는 아하즈에게, 이사야는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한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그 아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 주는 표징이다. (이사야 7,10-14; 8,10ㄷ).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따른 번제물과 속죄 제물이 아니라 당신의 그 몸을 제물로 바치시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히브리서 10,4-10).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리아의 응답으로 말씀의 강생이 이루어진다. (루카복음 1,26-38).
시편 40(39),7-8ㄱㄴ.8ㄷ-9.10.11(◎ 8ㄴ과 9ㄱ 참조)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 당신 정의를 제 마음속에 감추어 두지 않고, 당신 진리와 구원을 이야기하며, 자애와 진실을 큰 모임에서 숨기지 않나이다. ◎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루카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오늘의 말씀 전례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자신을 송두리째 봉헌한 분들을 만납니다. 영원하신 말씀께서 사람이 되기를 받아들이신 응답은, 하느님이 아닌 우리에게는 이해도 상상도 불가능한 응답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시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 내어 줌의 연장이며 완성이었습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를 받아들이신 성모님의 응답 또한, 한순간에 끝나는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처녀로서 잉태하여 겪게 될 위험은 생명을 내어놓는 것 이상이었고, 설령 그 죽음을 피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서는 당신의 삶을 모두 바쳐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리라는 전갈을 들었을 때, 성모님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각오해야만 하셨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 우리 구원을 위하여 이런 응답들이 필요했습니다.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이런 응답들을 원하셨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내 뜻대로나 나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내 삶을 송두리째 드리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나의 구원이고 인간이 자기 자유를 최고로 발휘하여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주님의 뜻을 “즐겨” 이룬다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후렴).

<응답과 순종> 송영진 모세 신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주님의 탄생을 예고한 일은 이제 곧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 준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그 '큰일'을 하신다는(루카 1,49) 예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수많은 처녀 가운데에서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은 마리아가 가장 적임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유일한 처녀였다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한 이' 라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신다고 말한 것이(루카 1,28)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천사가 한 말은 마리아가 은총을 받을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또 마리아가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은총을 주시고, 함께 계셔 주신다는 뜻이긴 하지만,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뜻은 아니고, 마리아도 함께 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메시아 잉태와 탄생, 또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관해서 설명하는 천사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의 뜻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나도 원합니다. 그래서 종이 순종하듯이 주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입니다. 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리아 자신도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응답과 모세의 응답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이집트로 가서 백성을 구하라는 임무를 주셨을 때, 모세는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서 못 가겠다고 말합니다(탈출 4,10).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설득하십니다. 그래도 모세는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말합니다(탈출 4,13). 그랬다가 하느님께서 모세의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자 그때서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합니다(탈출 4,14-18).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일을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 자신도 원하는 일이었지만, 여러 가지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에는 아직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또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동정녀로서 아기를 잉태하고 낳는 일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어머니로서 겪게 될 많은 고난들을...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은 단순히 예수님 잉태와 출산에 대한 응답과 순종만은 아니고 그 후에 겪게 될 모든 십자가에 대한 응답과 순종이기도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좋은 말'만 했지만, 마리아가 자신이 겪게 될 고난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했고, 응답했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은 일생 동안, 지상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흔들림 없이 이루어진 일입니다. 마리아의 생애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어머니가 서 계셨다고 기록했습니다(요한 19,25). 또 사도행전 저자는 예수님 승천 후 교회 공동체 중심에 어머니가 계셨음을 기록했습니다(사도 1,14). 이것은 모두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이 생애 끝까지 계속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응답과 순종을 '끝까지' 지속해야 한다는 점에서 배반자 유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분명히 유다도 처음에는 "나를 따라라." 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것이고, 다른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멈추거나 다른 길로 간다면, 처음부터 따르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묵시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 2,4-5)."
이 말씀은 에페소 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인데, 오늘날의 우리도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여기서 등잔대를 치워 버리겠다는 말은 교회의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뜻입니다. (개인으로 생각하면, 신자의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뜻입니다.)
자격을 잃는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즉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의 믿음과 사랑을 끝까지 지켜야 하고, 혹시 중간에 추락했더라도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믿음과 실천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한 번 하신 일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추락한다면 우리 스스로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은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라 반영억 신부
매년 정기적인 사제 인사이동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인사권자인 교구장 주교님께서 발표하시기도 전에 신부님들 사이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누가 어디로 갈 것이라고 나름대로 자리배치를 다 합니다. 그러나 막상 인사발령 공문을 받으면 의외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인사권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내 생각과 그분의 생각은 분명히 다릅니다.
수도자들은 정결과 순명, 청빈을 서약합니다. 사제들은 사제수품 때에 독신과 순명을 서약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가난한 삶을 살 것을 권고 받습니다. 그렇다면 교구장을 통해서 주어지는 삶의 자리가 복된 곳이고 그곳에서 기쁨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 서운함을 갖기도 합니다. 누구는 좋은 대로 가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 외곽으로 빙빙 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며 더 있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떠나기도 합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분명 지금 있는 자리가 예수님께서 안배하신 자리로 믿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뜻에 목숨을 담보로 응답을 하셨는데 우리의 모습은 내 입맛에 맞는 것만을 찾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물론 신부님의 강론도, 이웃들의 애정 어린 충고도 내 구미에 맞지 않으면 서운함만 쌓이고 맙니다. 순명은 기적을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적을 낳기보다 불신만 커갑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동이 얼마나 주요한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가1,37). 고 하셨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영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안에서 순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명동 마당에 작은 꽃들이 핀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곧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필 것입니다. 어느 교실에서 한 학생이 대답한 것이 생각납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옵니다.’ 봄이 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고,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고, 그렇게 우리들 가슴에도 봄이 올 것입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봄은 매년 우리의 곁을 찾아 올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봄은 계절의 봄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해방이었습니다. 봄의 길목에서 ‘시’를 한번 감상하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남의 땅 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 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찿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ㅡ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지금 우리의 신앙은 계절의 변화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려는 이들의 응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 가슴에도 봄이 찾아 올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루카 1,37)
여러분은 남자를 모르는 여자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구세주가 십자가에 무참하게 못박혀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만드셨다니
그게 가당찮은 일이라고 여기십니까?
나같은 보잘것없는 사람,
아니 정말 못된 흉악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하실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하느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은 사람이 사흘만에 부활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불가능해 보여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참신앙인입니다.
내 생각에 불가능해 보인다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믿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하느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렇다면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담을 수 있었고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할 그릇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담을 그릇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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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37~38)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hoti; for)로 시작되는 루카 복음 1장 37절은 의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자에게 임신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즉 하느님의 모든 말씀은 불가능이 없기 때문이다.
원문의 '말씀'에 해당하는 '레마'(rema)는 일차적으로 '생생한 목소리로 선포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루카 복음 1장 37절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 탄생에 관해 예언된 모든 말씀을 의미하며, 이러한 예언들이 마치 생생한 목소리로 선포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뒤나테세이'(adynatesei; is impossible)는 '아뒤나토스'(adynatos)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아뒤나토스'(adynatos)는 '능력있는', '강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뒤나토스' (dynatos)에 부정 접두사인 '아'(a)가 붙어서 '능력없는', '약한'이란 뜻을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아뒤나테세이'(adynatesei)는 앞의 '우크'(ouk; nothing)와 연결되어 이중 부정의 의미를 갖고서 매우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과 권세가 있어서 마리아에게 선포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은 노쇠하여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던 아브라함에게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며 아들 이사악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창세18,14)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루카 복음 1장 38절은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믿는 마리아의 순수한 신앙을 잘 보여 주며, 이러한 신앙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고 잔치집 일꾼들에게 지시함으로써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가 자신을 지칭한 단어인 '둘레'(doule; servant)는 '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doulos)의 여성 명사로서 '결코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하녀(계집종)'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주인', '주님'을 의미하는 '퀴리오스'(kyrios)의 소유격 '퀴리우'(kyriu)와 연결되어 철저하게 주님께 예속된 능력없는 계집종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완전하게 맡기겠다는, 철저한 순종과 겸손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본문 서두에 기록되어 있는 '보십시오'에 해당하는 '이두'(idu)라는 단어는 마리아의 이러한 마음을 잘 드러내 준다.
'이두'(idu)의 용법은 이야기의 생기를 돋우어 주거나, 듣는 이나 읽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킬 때, 그리고 좀 더 깊은 생각을 촉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루카 복음 1장 38절에서는 이 단어가 동사없이 명사와 함께 사용되어 마리아 자신의 '종'으로서의 존재를 천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줌으로써, 자신의 겸손함을 더욱 드러내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신 대로'에서 '대로'에 해당하는 '카타'(kata)라는 전치사는 목적격과 연결되어 뒤에 오는 명사의 내용이나 본질이 조금도 훼손되는 일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는'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에 해당하는 '게노이토'(genoito; may it be)는 '발생하다'는 뜻의 '기노마이'(ginomai)의 희구법으로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마리아의 염원을 담고 있다.
비록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보증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었기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라는 위대한 순종의 신앙을 보여 주었다.
바로 이 순간이 마리아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의 모친으로서의 성소를 허락하는 순간이며,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피와 살을 취하고 인간의 역사안으로 들어오는 강생(육화; Incarnatio)의 순간이기에, 우리는 사도신경과 삼종경을 바칠때 고개를 숙여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흠숭의 예를 드리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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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37~38)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hoti; for)로 시작되는 루카 복음 1장 37절은 의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자에게 임신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즉 하느님의 모든 말씀은 불가능이 없기 때문이다. 원문의 '말씀'에 해당하는 '레마'(rema)는 일차적으로 '생생한 목소리로 선포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루카 복음 1장 37절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 탄생에 관해 예언된 모든 말씀을 의미하며, 이러한 예언들이 마치 생생한 목소리로 선포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뒤나테세이'(adynatesei; is impossible)는 '아뒤나토스'(adynatos)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아뒤나토스'(adynatos)는 '능력있는', '강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뒤나토스'(dynatos)에 부정 접두사인 '아'(a)가 붙어서 '능력없는', '약한'이란 뜻을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아뒤나테세이'(adynatesei)는 앞의 '우크'(ouk; nothing)와 연결되어 이중 부정의 의미를 갖고서 매우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과 권세가 있어서 마리아에게 선포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은 노쇠하여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던 아브라함에게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며 아들 이사악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창세18,14)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루카 복음 1장 38절은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믿는 마리아의 순수한 신앙을 잘 보여 주며, 이러한 신앙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고 잔치집 일꾼들에게 지시함으로써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가 자신을 지칭한 단어인 '둘레'(doule; servant)는 '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doulos)의 여성 명사로서 '결코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하녀(계집종)'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주인', '주님'을 의미하는 '퀴리오스'(kyrios)의 소유격 '퀴리우'(kyriu)와 연결되어 철저하게 주님께 예속된 능력없는 계집종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완전하게 맡기겠다는, 철저한 순종과 겸손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본문 서두에 기록되어 있는 '보십시오'에 해당하는 '이두'(idu)라는 단어는 마리아의 이러한 마음을 잘 드러내 준다. '이두'(idu)의 용법은 이야기의 생기를 돋우어 주거나, 듣는 이나 읽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킬 때, 그리고 좀 더 깊은 생각을 촉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루카 복음 1장 38절에서는 이 단어가 동사없이 명사와 함께 사용되어 마리아 자신의 '종'으로서의 존재를 천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줌으로써, 자신의 겸손함을 더욱 드러내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신 대로'에서 '대로'에 해당하는 '카타'(kata)라는 전치사는 목적격과 연결되어 뒤에 오는 명사의 내용이나 본질이 조금도 훼손되는 일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는'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에 해당하는 '게노이토'(genoito; may it be)는 '발생하다'는 뜻의 '기노마이'(ginomai)의 희구법으로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마리아의 염원을 담고 있다. 비록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보증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었기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라는 위대한 순종의 신앙을 보여 주었다. 바로 이 순간이 마리아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의 모친으로서의 성소를 허락하는 순간이며,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피와 살을 취하고 인간의 역사안으로 들어오는 강생(육화; Incarnatio)의 순간이기에, 우리는 사도신경과 삼종경을 바칠때 고개를 숙여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흠숭의 예를 드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