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목요일>아브라함보더 먼저 (요한 8,51-59)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실 것이고,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된다. (창세기 17,3-9 )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다인들과 논쟁하시면서, 당신께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한다. (요한복음 8,51-59).
시편 105(104),4-5.6-7.8-9(◎ 8ㄱ)
◎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그분이 이루신 기적과 이적을, 그분 입으로 내리신 판결을 기억하여라. ◎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날을 보리라고 희망하면서 즐거워했다는 말씀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이 있지만 어느 한 가지도 분명한 풀이로 제시하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오늘 독서에 비추어 살펴본다면,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기다리던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고,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이 약속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본 것은 아니고, 단지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그는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히브 11,13). 아브라함이 기다리던 그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완전하게 이루어졌기에, 약속을 기다리던 아브라함보다 그 약속의 성취이신 예수님께서 더 크신 분이시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당신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오늘 요한 복음의 장면을 묵상할 때, 공관 복음서의 다른 장면이 연상됩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병행) 두 장면 모두 모호합니다. 마태오 복음의 첫 구절에 기록되었듯이,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심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두 가지 명칭에 대하여 유보를 하십니다. 유다인들이,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어서 아브라함이 예수님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요한 8,53 참조).
그러나 아브라함이 기다린 분은 아브라함보다 크신 분,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계신 분,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성조들의 기다림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야고 2,17).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일단 죽게 됩니다. 그랬다가 종말이 오면 모두 부활해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사람은 죽지 않고 산 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1테살 4,15-17).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요한 8,52-53)"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라는 말은 "당신은 미쳤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말은, "아브라함과 예언자들도 하지 못한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라는 뜻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안 믿었지만(루카 20,27), 바리사이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부활과 영생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하는 말은 부활과 영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한낱 인간인 당신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신원, 권한, 권능'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요한 8,54-56)."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과 권능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느님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연히 아브라함보다 위대하신 분, 아브라함이 희망하고 기다렸던 바로 그분, 메시아입니다. ('나의 날'이라는 말은 메시아 시대를 뜻합니다. '보고 기뻐하였다.'는 믿음과 희망 속에서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라고 선언하시는데, 이 선언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는 요한복음의 머리글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예수님께서 주신다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믿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면 됩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고 희망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안 믿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 말고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대충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가? 믿거나 말거나 그것은 각자 선택할 일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각자 자신의 책임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프고, 아프고, 무서운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그렇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종교와 신앙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들의 노력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기를 희망하고,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삶'을 희망하는 인간들에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고, 또 인간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믿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부활과 영생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이 오기 전까지는 글자 그대로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그러나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진다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그때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부활과 영생을 믿고, 희망하고, 추구하면서, 또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하느님의 권위 아래서 반영억라파엘 신부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 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 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한 1,14). 그렇다면 그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완고하고 편협한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가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 어디에도 억매이지 않으며 죽음마저 극복하는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통교 안에 초대받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드셨으니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유클리드 기하학, 해석 기하학,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세상을 이해 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거시세계는 물론, 미시세계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고,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의 능력으로는 우주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유전자를 파악했어도, 높은 건물을 지었어도, 우주선으로 지구를 벗어났어도 인간은 아직은 초라하고, 부족합니다. 수학, 물리, 경제라는 옷이 화려해 보여도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근심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양심, 선함, 사랑, 나눔, 희생, 헌신을 수학적인 방법으로 계산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불안, 근심, 시기, 질투, 분노, 원망을 물리적인 법칙으로 풀어낼 수 없습니다.
미분과 적분으로 계산을 할 수는 있지만 가치와 존재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색의 조합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는 사람만이 돌아온 탕자를 바라보고 감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의 분자식 ‘H2O'로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물리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많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식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의 관점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물리의 법칙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르다.”
사랑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분은 결혼하고 몇 년 후에 남편께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우연히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고, 남편은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남편은 몸은 깨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깨어난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힘들게 했다고 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짜증을 내는 그런 남편을 23년간 수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남편만으로도 힘에 벅찬데 시어머니께서도 쓰러지셔서 한집에 2명의 중환자를 돌봐야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도 10년 이상 돌봐드려야 했던 그 분은 왜 하느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하느님 원망을 참 많이 했다고 합니다. 병중에 시어머니도 세례를 받아서 함께 묵주기도를 했지만 원망과 고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그분의 품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남편도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조금 숨을 돌리나 했는데 이제는 본인이 암에 걸려서 큰 수술을 했어야 했습니다. 남편 복도 없었고, 시어머니 복도 없었는데 자신까지 암에 걸렸으니 정말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컸다고 합니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돌아와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십자가를 주셨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요한 8,54)
우리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삶에서는
"영광은 나에게 고통일랑 하느님께..."라고 하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어하고
"잘 한다"
"착하다"
"예쁘다"
이런 말을 듣고싶어 합니다.
사실 모든 좋은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고
자신에게는 그 어떤 영광도 돌리지 않은 종이 참으로 겸손하고 가난한 종입니다.
오늘 내가 잘 한 일이나 수고한 일이 있으면 다 주님 덕분이라 여기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립시다.
"영광송"은 나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겁니다.
이걸 잘 하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시길 빕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량께...."
오상선바오로 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58~59)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이 존재했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요한 복음사가가 이 복음서의 서두에서부터 강조한 예수님의 신성(神聖)과 선재성(先在性)에 대한 신학적 주제와 관련된다.
특히 요한 복음 8장 5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에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낼 때, 그리고 신적 본질을 나타낼 때 흔히 사용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라는 양식의 진술을 통해 자신의 신성(神聖; diety)과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을 동시에 명백하게 나타내셨다.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라는 양식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인 탈출기 3장 14절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 선언의 중요성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며 중요한 영적 진리를 선포하실 때 주로 사용하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에 해당하는 '아멘 아멘 레고 휘민'(amen amen lego hymin; I tell you the truth)으로 시작된다.
요한 복음 8장 58절에서 아브라함은 과거 어떤 시점에서 태어난 존재임에 반하여,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였음을 명백하게 나타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아담 이전, 즉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광 중에 계신 하느님이심을 유대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요한17,5),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요, 신성(神聖)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유대인들은 규정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 본질을 모르면 그분의 주장을 믿고 수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사람들의 태도에서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당신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예수님의 주장을 그들이 존경하는 조상 아브라함을 비하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당신 자신이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를 범한 죄인으로 여겼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께 돌을 들어 던지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중죄인, 특히 신성 모독죄를 범한 자들은 돌로 쳐죽이는 관습이 있었다(레위24,16).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 당시 자신들을 반대하는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과 더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신성 모독죄라는 죄목을 들어 돌을 던지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셔야 할 더 큰 일을 자각하시고, 잠시 뒤로 물러나시는 지혜로운 행동을 보이신다. 여기 '성전 밖으로'에 해당하는 '에크 투 히에루'(ek tou hierou;
out of the temple)는 '성전에서 밖으로'라는 뜻이다. '히에루'(hierou)는 '히에론'(hieron)의 단수 소유격이다. 여기서는 건물과 마당을 다 포함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성전 밖으로 몸을 숨기셨다는 것은 결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이미 당신 자신을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한 희생 양으로 내어 놓으셨으므로 새삼스럽게 죽음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다만 아직 아버지께서 정하신 떄가 이르지 않았기에 피하셨을 뿐이다. 그분께서는 언제든지 하느님의 계획 및 목적에 보조를 맞추셨다. 앞서 나가거나 뒤에 처지는 일이 없이 언제든지 그분의 뜻을 따르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