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일 (요한복음 10,31-42)

2015. 3. 27. 오전 7:53:01

글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2015. 3. 27. 금)(요한 10,31-42)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예레미야는 박해를 받는다. 가까운 이들도 모두 그를 거부한다. 박해자들은 숫자도 많고 강하지만,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박해자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을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한다. (예레미야서. 20,10-13)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분께 돌을 던지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신다.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 (요한복음 10,31-42)   

 ♪-♫ ~야훼~나의목자 아쉬울것 없노라...

시편 18(17),2-3ㄱ.3ㄴㄷ-4.5-6.7(◎ 7 참조)
◎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
○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 ◎
○ 주님은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시옵니다. 찬양하올 주님 불렀을 때, 저는 원수에게서 구원되었나이다. ◎
○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삼키며, 저승의 오랏줄이 나를 휘감고,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덮쳤네. ◎
○ 곤경 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 ◎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10.15.수.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예레미야서를 강의하다가 신학생에게서 예언자들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인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곧, 신탁(神託)이나 예언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주어졌을 때, 예언자들 가운데는 그 말씀이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기에 바로 대답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말해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분명한 확신이 있지 않았더라면 예레미야처럼 목숨을 걸고 죽기까지 말씀을 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언자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군중의 반대와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그의 말과 삶이 그의 확신을 방증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의 다섯 편의 고백록 가운데 마지막 편에 해당합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그동안 묵상해 온,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예레미야의 태도도, 예수님의 태도도 시종일관 분명하고 확고합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하고 그분을 붙잡으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맞서시는 예수님의 대답도 지극히 단호하고 당당합니다. 당신 자신의 처신에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길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이러한 용기가 솟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여 사람들이 돌을 던지더라도 나의 길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3.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

하느님과 하나 되는 특권   반영억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 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일>   송영진 모세 신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호소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내가 하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것을 믿는다면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만일에 정말로 그렇다면 믿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사탄의 일을 하는 것이고, 사탄의 일을 하고 있다면 사탄이 보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믿어도 안 되고, 따라가도 안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1요한 4,8).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전부 다 사랑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어떤 일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즉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따라야 합니다.

만일에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사탄 편에 선 사람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이 말은, 마귀 들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랑은 없고 증오심만 부추기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은 사탄 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해 우리나라에 큰 슬픔과 아픔이 있었을 때,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온갖 나쁜 말들을 쏟아내면서 더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분명히 선(善)도 없었고,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어떤 신념에 의한 행동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랑 없는 신념은 세상에 증오심을 뿌리는 사탄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사탄의 씨를 뿌린다면 사탄의 하수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대표적인 예가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 일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요한 11,45). 그러나 라자로가 살아난 것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습니다(요한 11,46).

또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일이 표징(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요한 11,47) 예수님을 안 믿었고, 안 믿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요한 11,53). 

'벳자타 못 가'에 있었던 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직접 은총을 받은 당사자였으면서도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안식일 율법을 어기게 만들었다고 밀고했습니다(요한 5,15). 자기가 받은 '사랑'과 '은총'에 대한 기쁨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서 받게 될 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그 병자는 사랑과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안 믿은 사람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를 고쳐 주셨을 때, 그것을 본 회당장이 분개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그 회당장은 하느님의 사랑은 보지 않고 율법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율법을 안 지킨다는 생각만 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5-16)" 사랑은 보지 않고 율법만 생각한 그 회당장이 진짜로 사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사람입니다. (그 회당장의 모습에서 사법 체계만 따지는 오늘날의 정치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또 이웃의 아픔에는 관심 없고 세상과 거리를 두려고만 하는 일부 종교인들의 모습도 봅니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더라도 예수님의 일들을 안 믿는(실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1-2).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믿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마 9장 32-34절/ 예수를 뒤따라 이적을 행하라는 숙제[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9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이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1982년 처음으로 만났으니 33년 동안 친구로 지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는 함께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친구는 운전을 참 좋아했습니다. 여행을 다닐 때면 저를 위해서 운전을 하곤 하였습니다. 운전을 좋아하던 친구가 하느님의 품으로도 먼저 가고 말았습니다. 

김 수환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사목을 하였던 친구가 이제는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은 삶의 길이도 중요한 것이지만, 삶의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24년 동안 사제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에 태어나셨고 184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사제서품은 1845년에 받으셨고 1846년에 순교하셨습니다. 26살에 순교하셨고, 사제생활은 1년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아주 젊은 나이에 순교를 하셨고, 사제생활도 아주 짧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으며, 한국의 수선탁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짧은 생이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하느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절망 중에 있는 사람, 슬픔과 분노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것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도 해야 하며, 조롱과 멸시를 당할 각오도 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와 같은 일을 하다가 조롱과 멸시를 당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따르는 일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편하기도 하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거름이 되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양분을 찾아 올리는 뿌리가 되기보다는 화려한 꽃이 되기를 더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꼴찌가 되라는 말, 회당에 앉을 때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 밀알 한 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그분이 하신 말씀들은 현실의 삶에서는 실천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 돌을 던지려 했던 것입니다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명동의 거리는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합니다. 명동의 거리가 깨끗할 수 있었던 것은 새벽어둠에 나와 거리를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길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상을 아름답게 지켜나가는 참된 신앙인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는 자선, 희생, 선행은 힘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는 나눔, 사랑, 봉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 ,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 조 진섭 요셉과 죽은 모든 이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요한 10,34-35)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성만 보고 그분의 감추어진 신성을 못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성모독죄로 고발합니다.

우리 또한 신인이신 예수님 덕분에
인간이면서도 신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는 모두 신이라네요.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는 신이랍니다.

인간이면서도
하느님을 많이 닮은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신이신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절 받으소서~~^^

 

오상선바오로 신부

 

예수살이 

사람들은 나를 향해 엄청난 존경의 표시를 한다.

신부라고, 티없다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곰곰히 내 생애를 뒤로하고 보면 나도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아니다.

하루하루를 엄청난 거짓으로 시작하고 맥없이 쓰러지면서

내게 수 없는 잡음 속에서도 오롯한 관건이 되는 것은

예수를 팔아야 한다는 것

얼마나 잘 포장해서 팔아야 하는 것이

아픔이지만 현실이 되어 버렸다.

벗이라 가슴을 움켜잡으며 다가오는 그를 모질게도 팔아 넘기고 내가 살았다.

예수를 얼마나 더 팔아야 사람들에게서 감동의 말, 잘했다는 말

음흉한 찬사의 말이 멀리 튕길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하고 더 큰 번민을 해보아도 이제 나는 예수를 잘 팔 수 없다.

그를 향한 벗이기를

벅찬 호흡으로 함께 하기를

예수를 잘 팔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들 헉헉거리며 다가오는 이들에게

아주 조용히 엄숙히 말하고 싶다.

"예수를 잘 판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잘 살아 내는 것이라고".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34) 

본문은 시편 82장 6절을 70인역(LXX)에서 정확하게 인용한 말씀이기에 따옴표 역할을 하는 '호티'(hoti)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시편 82장 6절은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인데, 여기서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I have said you are gods)이 인용되었는데, 시편 82장 6절의 문맥은 원래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재판장들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사제들 및 재판장들은 하느님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백성들과 관련된 그들의 공적 업무에 신적(神的) 권위가 부여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판장들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재판을 진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임의성이 개입되어서는 안되고 철저하게 하느님께서 명하신 기준을 따라야 했다. 

여기서 '신'으로 번역된 '테오이'(theoi)는 문자적으로 '신들'(gods)로 번역된다.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복수형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것이 '엘로아'(eloa)복수로 간주되는 '엘로힘'(elohim)인데, '엘로힘'(elohim)이 하느님의 고유 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로 쓰일 때에는 '재판관들'(judges), '천사들'(angels)과 같은 복수형의 의미로 번역된다. 

이같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하느님을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자기 중심적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언급된 '신'하느님 자신을 가리키기 보다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일을 대신 수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 복음 10장 35절, 36절과 더불어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대리자를 신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께서 몸소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조금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아니시라는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절대시하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경직되고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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