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구리뱀 (요한 8,21-30)

2015. 3. 24. 오전 7:43:33

글자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모세의 구리뱀 (요한 8,21-30)

 

 Anthony Van Dyck: Moses and the Brazen Serpent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자, 모세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았고, 그 구리 뱀을 쳐다보는 이들은 살아났다. ( 민수기 21,4-9 ).

요한 복음에서는 이 구리 뱀을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의 예표로 본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구리 뱀처럼 높이 달리시어 구원의 원천이 되실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셨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오셨으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다. (요한 8,21-30.     

           

시편 102(101),2-3.16-18.19-21(◎ 2)
 ◎ 주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부르짖음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 주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부르짖음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곤경의 날에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당신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제가 부르짖을 때 어서 대답하소서. ◎
○ 민족들이 주님 이름을, 세상 모든 임금이 당신 영광을 경외하리이다.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헐벗은 이들의 기도를 굽어 들어주시고, 그들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리라. ◎
○ 오는 세대를 위하여 글로 남기리니, 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 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21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25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모세 사순절 이미지 (예수님 십자가)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인물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다가 잘못 알아듣게 됩니다.

단순하게 보이는 말씀 안에 다른 뜻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주의를 기울여 복음을 살펴봅시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내가 나라는 것,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다.”라는 한마디는 중대한 뜻을 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분께서 하신 대답이 “나다.”이기 때문입니다(탈출 3,14 참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느님이심을 깨달으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한편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을 뜻합니다. 십자가 처형을 현양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못 박은 다음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그분에게서 신성을 알아본다는 점은 더욱 역설적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의 말씀 전례는 이 복음을 민수기의 말씀과 함께 놓음으로써 그 십자가의 의미를 해석해 줍니다. 불 뱀에 물렸어도 높이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본 이들은 죽지 않았기에, 구리 뱀은 구원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전례와 같은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에게서 오시어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분이심이 드러납니다. 우리 안에 넘치는 생명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주어진 그 생명이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합니다.

 

집에서 세계여행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은 "내가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입니다.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는 "멸망할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다."입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이 일부 종파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예수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안 믿는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죄 속에서' 라는 말이 들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멸망하게 되는 사람들은 죄 속에서 살다가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고, 그 죄 때문에 멸망하는 사람들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멸망하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을 믿으면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보내 주셨는데도 그들은 메시아를 거부했습니다.  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도 거부했습니다.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메시아인 나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신자라는 것만 내세우면서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도 않고, 죄 속에서 산다면 멸망할 것이다." 믿음이란, 믿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항상 회개해야 하고, 선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양들이 목자를 믿고 따라가는 일과 같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3ㄴ-4)."

착한 목자는 양들을 좋은 풀밭으로 데리고 갑니다. 양들은 그가 착한 목자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따라갑니다. 만일에 믿지 않아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또는 믿으면서도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러면 좋은 풀밭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편견, 또는 여러 가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의 종착점을 보기 전이었기 때문에 믿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이 말씀의 뜻은,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었다가 부활하고 승천하게 되면 그때에는 내가 구세주라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될 것이고, 나의 일과 말은 모두 하느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음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의 종착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흔히 사용되는 비유인데, 지금 하는 말은 지뢰밭을 지나가는 상황을 설명하는 말과 비슷합니다. 지뢰밭을 통과할 때 부하들은 앞장서 가는 지휘관을 믿고 그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밟으면서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상황에서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앞장서 가는 지휘관이 지뢰를 밟지 않고 무사히 가는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가는 지휘관이 안전하니까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도 자기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또 무엇을 얻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막연한 희망 속에서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목적지도 분명하고, 우리가 얻게 될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합니다.  그것을 믿고,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그렇게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고, 기본입니다.

그런데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참아야 할 일도 많고, 포기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니고, 가다 보면 편안한 길을 만날 때도 있고 힘든 길을 만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사순시기와 같습니다. 단순히 힘들다는 뜻에서 같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향해서 간다는 점에서, 또 부활을 준비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혼자 버려두지 않는다     반영억 신부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가지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난 것이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 없이 행복합니다. 기왕이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과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시간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천상을 그리워하는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8,29).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 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 될 것입니다”(로마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대2,중1편)

“Rome was not built in a day!"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배운 영어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로마의 강점은 시민권에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아테나나, 스파르타는 시민권을 주는 규정이 엄격했다고 합니다. 아테나는 부모가 다 시민이어야만 시민권을 주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는 정해진 사람만이 시민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는 노예라고 해도 10년이 지나면 자유민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비록 이민족이라고 해도 능력이 있으면 로마의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가 위험에 직면했을 때, 로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로마를 지켰다고 합니다.

로마는 관용과 소통으로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함은 닫힘과 폐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열림과 소통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이룬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의 중심은 지구라고 하였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하나의 행성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부모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의 형제요, 부모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 만큼 소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전율이 일어납니다. 혁신과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관광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한 희생과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보았습니다. 가야할 길을 알고, 충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콘...십자가의예수님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민수 21,7)

우리 인간이 짓는 죄 중에 하느님께서 가장 역겨워하시는 죄는 무엇일까요?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그 어떤 죄도 용서하시겠지만
배은망덕하여 "불평불만"하는 죄만큼은 참으로 역겨워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이란 허송세월을 보낸 것도
알고보면 그 끝도없는 "불평불만"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행여 불평할 일이 생기면 바로 마음을 고쳐 먹으세요.
오히려 주신 은혜에 더 깊이 감사하십시오.
사실 우리는 이미 95를 받았고 5 정도만 좀 아쉬울 뿐이지요.
그 아쉬운 것 때문에 불평불만하기보단 95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불평 1번은 감사 20번을 드리고나서만 살짝 어리광 부리듯 해보는 거랍니다. ㅎㅎ

이상선바오로 신부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리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28)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29) 

'너희가 들어 올린'에 해당하는 '호탄 휩소세테'(horan hypsosete; when you have lifted up)가 실제로는 현재형으로 번역되고 있다(when you lift up). 희랍어에서 부정 과거가 직설법에서만 과거의 의미를 지닌다는 법칙이 있으므로, '휩소세테'(hypsosete)는 과거나 미래 완료로 볼 것이 아니라 '실제로 든다'는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으며, 영적인 눈으로 볼 때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에야 ~깨달을 뿐만 아니라 ~깨달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토테 그노세스테'(tote gnosesthe; then you will know)직역하면 '그리고나서 너희가 알 것이다'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비로소 그분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을'로 번역된 '그노세스테'(gnosesthe) '기노스코'(ginosko)의 미래 중간태이다. 

희랍어에서 중간태의 특징은 동작의 주인공을 강조하며, 동작과 주격을 보다 밀접하게 관계지어 준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때가 이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실하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므로,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 사람들조차 이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재림하실 때에,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한편 요한 복음 8장 29절은 앞의 8장 28절와 함께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하시는 친밀한 일치의 이유가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언제나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임을 밝힌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일을'에 해당하는 '타 아레스타'(ta aresta; what please him; those things that please)복수형으로서 '기뻐하는 일들', '뜻에 맞는 일들'이라는 뜻이며, 예수님께서 힘써 추구하시는 것들이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맞는 일로서 그분의 기쁨이 되는 일들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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