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요한 7,40-53)

2015. 3. 21. 오전 6: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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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4주간 토요일(요한 7,40-53)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향 사람들이 그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민다. 예레미야는 그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주님께서 그에게 알려 주셨다. 아무도 믿고 의지할 수 없게 된 그는 하느님께 자신의 처지를 맡겨 드린다. (예레미야11,18-20)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출신임을 아는 이들은 그분께서 메시아이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은 그분께 감히 손을 댈 수 없었지만, 유다교 지도자들은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결코 나올 수 없다고 단정 짓는다. (요한 7,40-53)   

                                  

시편 7,2-3.9ㄴㄷ-10.11-12(◎ 2ㄱ)
◎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 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 
○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 하느님은 나의 방패, 마음 바른 이들을 구하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신 심판자, 하느님은 언제든 진노하시는 분.

 바리사이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요한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바리사이파4

아이같이 오늘 복음을 읽어 보겠습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 7,41-42)

아주 단순하게 …….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시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니 메시아의 조건을 갖추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족보와 출신지를 잘못 알고서, 갈릴래아에서 메시아가 나올 수는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위와 같이 풀이를 한다면 복음을 정말 단순하게 읽은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어제 복음에서 보았던 것처럼, 요한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박해한 사람들은 그의 고향 아나톳 사람들이었습니다(예레 11,21 참조). 그들은 예레미야를 안다고 생각했고, 그가 전한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저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셔야 하고 어떤 말씀을 하셔야 하는지를 먼저 정하고 있습니다.

착각입니다. 하느님은 아나톳 사람들을 통해서도 당신 말씀을 전할 수 있으시고, 갈릴래아에서도 메시아를 일으킬 수 있으십니다.
내 옆에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내가 정한 기준이나 한계에 묶이지 않습니다.     

 

 위선자의 무리, 바리사이파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지도자들>     송영진 모세 신부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는데(요한 7,32), 경비병들은 그냥 돌아옵니다(요한 7,45). 그 이유를 묻자 경비병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이 말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라는 뜻인데,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경비병들이 한 말은, "그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다." 라는 뜻이 됩니다.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 증언을 거부합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요한 7,47-48)"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으니까 예수는 예언자가 아니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도 자기들이 먼저 승인해야 한다는 말과 같고, 그래서 이 말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오만한 말입니다.

또 그들은 경비병들이 속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속이는 자', 즉 사기꾼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그들은 노골적으로 사기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마태 27,63)." 

바리사이들은 경비병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경비병들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이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 같은 무식한 자들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서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고, 저주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만 옳다는 독선에 빠져 있는 자들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천대하는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경비병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아랫사람들이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꼭 공적인 예언자들을 통해서만 전하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전하시는 분입니다.

소년 다니엘이 수산나를 구한 일이 좋은 예입니다. 수산나가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습니다(다니 13,45). 당시의 원로들은 소년 다니엘이 하느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니엘에게 재판관의 자격을 주었습니다(다니 13,50).

우리는 사회적으로 보잘것 없는 사람도 후배도 부하도 하급자도 어린이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고 진리를 증언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경비병들이 정말로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바리사이들은 경비병들의 증언을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하느님께 반역하는 죄를 안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니코데모가 바리사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지금 니코데모가 한 말은 바리사이들이 율법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 추정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니코데모도 바리사이였고 최고 의회 의원이었습니다(요한 3,1). 아랫사람들이 하는 말이라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사이들은 갈릴래아 지역에 대한 편견 때문에 동료가 하는 말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그런 말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2. 그런 말은 갈릴래아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바리사이들의 말은,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으니 예수는 예언자가 아니다." 라는 앞의 말과 비슷합니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는다는 말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제한하는 말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사실은 요나 예언자가 갈릴래아 출신이기 때문에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는다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틀린 말입니다.)

아랫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하는 말도 안 듣고,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서 정당한 비판도 안 듣고, 자기의 생각과 자기가 하는 일만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종교 지도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신앙인들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 어떻게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러면서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또 진리에서 멀어질 것이고, 죄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입니다.

 

신약인물 - 위선자의 무리, 바리사이파 사람들

스승행세를 하지마라     반영억신부

 

어떤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보았고, 예언자로 메시아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율법만이 보였습니다. 오늘도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사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헛된 바람을 지니지 말고 기도와 성사에 적극참여 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뭘 좀 안다고 스승행세를 하지 말고 삶의 모범과 표양, 행동으로 보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바리사이파4

저의 외삼촌은 본당에서 연령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총구역장도 하셨고, 꾸리아 단장도 하셨었습니다. 작년 8월 동창신부님이 외삼촌이 계신 본당으로 가셨습니다. 외삼촌은 조카 신부의 동창신부님이 오셨으니 더 잘해 드리고 싶었나 봅니다. 며칠 전에는 저를 초대해서 본당 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동창신부님도 보고 싶고, 외삼촌의 청이라 거절하기도 어렵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대부분은 가족 중에 성직자가 있으면 더욱 조심하곤 합니다. 봉사도 더 열심히 합니다. 성직자의 가족이라고 잘난 척하면 본인은 물론 성직자에게 누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세로 봉사하시는 외삼촌이 고마웠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힘들어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친인척들의 비리였습니다. 어떤 분은 동생 때문에, 어떤 분은 아들 때문에, 어떤 분은 사돈의 팔촌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본인들의 경거망동도 있었지만 그런 인척관계를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좋아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좋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죽을 자에다가 배우자라는 이라고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일의 종류나 일의 가치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장소와 일을 하는 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자세입니다. 아무리 누추한 곳이라 해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은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그곳에 탐욕과 분노가 있다면 그곳은 악취가 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겉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장소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혈연, 세대, 지역, 학연이라는 틀에 갇혀서 진실을 보지 못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런 을 넘어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이 오면 어두운 땅 속에서 파란 새싹이 나올 것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저 풀과 꽃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더욱 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명화]바리사이파 시몬의 집에 함께하신 예수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요한 7,41)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우리가 아는 지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린 이런 반응을 하게 되지요.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부정적으로 나가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그게 맞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질께~"
"웃기고 있네~"
"미친 놈~~"
......
이런 막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왜 내가 알고있는 것과 다르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틀린 것이라고 단정하게 될까요?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저분은 예언자시구나!"한 사람들도 있었고
"저분은 메시아가 분명해!"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알고있던 성경지식을 근거로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급기야 폭력적이고 도발적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도 가끔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없어~"라고는 말하지 맙시다~
대신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습관을 기릅시다.

우리 신앙의 언어는
우리의 지식을 언제나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새로움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오늘 그 새로움에 감탄하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 한걸음 더 나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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