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3,55; 1,19 참조).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했는데,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기도 한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다.
오늘은 성모님과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충실한 도구로 선택되어 성가정을 돌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셨던 요셉 성인께서 오늘도 교회를 위하여 전구하여 주시기를 청하며 이 대축일 미사를 봉헌합시다.

다윗이 임금이 된 뒤에는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진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집안과 그 왕좌가 영원히 굳건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신다(사무엘하 7,4-5ㄴ.12-14ㄱ.16).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1,1)께서는 구약에서 약속된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약속이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어, 믿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되었다(로마서 4,13.16-18.22).
다윗 왕조가 무너졌어도 하느님의 약속은 유효하다. 요셉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다( 마태오 1,16.18-21.24ㄱ)<또는 루카 2,41-51ㄱ>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시편 89(88),2-3.4-5.27과 29(◎ 37ㄱ)
◎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 ◎
○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
○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

오늘 화답송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합니다.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시편 89,29). 그러나 이 시편은 다윗 왕조의 붕괴를 배경으로 하는 시편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후손을 약속하셨는데, 왕조가 무너지고 말았다면 하느님의 영원하신 자애는 어떻게 되는가? 하느님의 약속은 깨지고 말 것인가?’ 이것이 이 시편의 주제입니다.
믿는 모든 이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게 되면 하느님의 약속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았지만, 이렇게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했습니다(로마 4,18 참조). 시편 89편 또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다윗 왕조가 무너져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실낱같은 왕정복고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왕정 붕괴로 깨어질 수 없기에 하느님의 자애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자애가 보존될 수 있을지는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신약에 이르러 그 약속은 실현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약속이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선언합니다(로마 4,16 참조).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의 믿음, 곧 약속을 믿었던 의인 요셉은 그 약속된 후손이 태어날 수 있도록 말없이 협력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어 의인으로 인정받고 믿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었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마리아와 그 모태의 아기를 받아들인 요셉 성인은 우리 모두의 보호자가 됩니다.

<요셉> 송영진 모세 신부
3월 19일은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한국 교회의 주보성인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을 보면, 요셉은 무시해도 좋은 '들러리'가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사실은 요셉의 족보입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루카 1,27)', 즉 당시의 법으로는 사실상 유부녀인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을 함께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마리아와 함께 공동 주연입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을 마리아 중심으로 기록했고, 마태오는 요셉 중심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것입니다.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요셉의 말은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궁금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는 말도 없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말도 없고... 심지어 응답하는 말도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요셉의 말을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요셉은 원래 그렇게 말이 없는 사람이었을까?
1) 침묵과 묵상
요셉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침묵 속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요셉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마태 1,19)" 라는 말은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고민했을 것이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 잉태를 설명해 주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이 천사가 말한 대로 곧바로 행동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마태 1,24), 아마도 그때에도 침묵 속에서 묵상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묵상과 기도 끝에 결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마치 로봇처럼 명령에 복종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자유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이집트로 피신하는 장면을 보면(마태 2,13-15), 상황이 매우 급박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은 이해할 수 없어도 따져 묻지 않고,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어도 시간을 좀 더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바로 행동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천사가 롯에게 빨리 대피하라고 말해도 롯은 계속 망설이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롯과 그의 가족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가야만 했습니다(창세 19,15-16). 롯과 요셉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요셉은 상황 판단을 빠르게 하고, 즉시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이집트로 피신하는 장면은 확실히 그가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때에도 역시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종한 것은 아니고,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이다." 라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소년 예수님을 잃었다가 찾은 장면에도 요셉의 말은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으니(루카 2,48) 분명히 아버지로서 뭔가 말을 했을 것 같은데...어떻든 그 장면에서 소년 예수님을 잃었을 때 말없이 슬퍼하는 요셉의 모습, 또 찾았을 때 말없이 기뻐하는 요셉의 모습이 보입니다.
'말'에 대해서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야고 1,19)."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야고 1,26)." 우리는 요셉의 말수 적은 모습, 침묵 속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신속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2) 의로움과 자비
마태오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 1,19). 원문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잉태 사실을)' 감추려고 했기 때문에, 유대교 기준으로 보면 율법을 어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오가 말하는 법은 유대교의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 또는 그리스도교의 '자비의 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자비로운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율법이 없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율법의 근본정신대로 자비를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려고 오신 구세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적임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자비는 없고 율법만 내세운다면, 바리사이들 같은 무자비한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법은 자비와 함께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항상 사람이 먼저입니다. 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안에 의로운 사람 반영억 신부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의로운 사람” 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3,5 2코린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 성인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 성인에게 배필로 마리아를 소개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중매를 하였습니다. 중매는 잘하면 쌀이 서말이요, 잘못하면 뺨을 맞는다고 합니다. 성서에 말하는 대로 마리아는 요셉과 혼인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음이 드러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뺨을 맞을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그렇게만 살아도 존경받을 사람입니다.
거짓과 욕망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자신의 것을 빼앗겨서는 잠을 못 이루는 세상입니다. 무한 경쟁의 세상입니다. 재물을 위해서는 영혼까지도 팔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사는 것입니다. 어두운 바닷가에 등대처럼 사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의롭게 살지는 못하였습니다. 법대로 살기에도 벅찬 세상입니다.
뺨을 맞을 처지에 있던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에게 또 다른 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뜻’이니 받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의롭게 살던 요셉 성인은 깊은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에게 ‘시련은 있어도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 이집트로 보낸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욥은 재물, 건강, 자녀들을 잃어버린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성인은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정도만 살아도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운전을 한다면 준법운전은 물론 안전운전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한 차원 더 높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고, 이해 할 수 없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순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서에서 요셉 성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분께 사랑을 드리고, 그분을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신분으로 살았는지, 어떤 피부색으로 살았는지, 어떤 성별로 살았는지, 얼마나 큰 업적을 쌓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충실하게 살았는지 일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들은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 4,18)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앞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고 온통 절망 뿐입니다.
이제 다 내려놓고
그냥 스러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안보입니다.
누구 이야기냐구요?
믿음의 성조 아브라함의 이야기이고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에 대해 경탄하며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요셉에 대해서도 똑같이 경탄하며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요?"
나와 평생을 행복하게 함께 하겠다고 언약한
그 아리따운 나의 약혼자가 남의 아이를 베어 왔는데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리아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나요?
절망의 늪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희망의 꽃을
어떻게 보셨나요?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사랑의 사람이 됦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은 함께 갑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음으로써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의 선물을 주는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조 아브라함,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